[김나미의 열린마음, 열린종교] 13. 퀘이커 (Quakers)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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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세상에 이런 예배가 다 있을까." 서울 신촌 '퀘이커의 집'에는 십자가도 성경도 찬송도 설교도 없다. 대신 긴 침묵만이 흐른다. 말소리 하나 없는, 사람의 숨소리만 들리는 적막 그 자체다. 퀘이커의 침묵 예배는 성령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성령의 메시지가 있을 때만 일어나 입을 연다. 정식 명칭은 종교 친우회(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우리나라에는 한국전쟁 직후 전해졌다.

▶ 깊은 명상에 잠겨있는 미국인 톰 코이너. 인간과 성령의 직접적 만남을 추구하는 퀘이커 신자다.

군산도립병원에서 의료 활동을 하던 미국.영국인 퀘이커에 감화받은 사람들이 가정집을 돌며 예배를 시작한 게 벌써 50년이 됐다.

퀘이커 한국모임은 1960년대 함석헌 선생의 영향으로 붐을 이룬 적이 있으나 89년 함 선생이 타계하며 내부 혼란과 갈등으로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이후 10년 넘게 모임이 없었으나 4년 전 몇몇 옛 퀘이커의 노력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신촌 예배에는 10~20명이 참석한다.

예배 중 파란 눈 때문에 눈에 띄는 톰 코이너. 미국계 신용카드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의 한국 지사장으로 있다. 미국 오리건주에서 태어나 콜로라도 대학에서 일본학을 전공했다.

장로교 신자였지만 대학 시절 퀘이커 동아리 모임에 참석하곤 했다. 75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와 한국인과 결혼하고, 부인과 함께 퀘이커가 됐다. 함석헌 선생의 영문 홈페이지도 4년째 운영하고 있다.

부인 최예리씨는 불교적 퀘이커이다. 알고 보니 퀘이커의 성격은 다양하다. 가톨릭적 퀘이커가 있고 감리교에도 퀘이커 목사가 있다. 종교적 성향이 달라도 퀘이커가 될 수 있는 것.

코이너는 "교리나 이론보다 성령과 하나가 돼야 하지 않습니까"라며 신비주의 체험을 강조했다. 침묵 속에서 내면을 깊이 체험하면 성령으로 빨려들어간다는 얘기다.

"개신교가 성서 중심이라면 우리는 성령 중심입니다. 성령을 빼고 나면 뭐가 있을까요. 핵심은 '내면의 빛(the light within)'입니다."

17세기 영국인 조지 폭스가 제창한 퀘이커는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종교기구가 됐다. 초창기 필라델피아에서 크게 일어났고, 지금은 인디애나주와 아프리카 케냐에 신자가 많다. 하지만 전세계 퀘이커는 30만명에 불과하다.

퀘이커는 신앙.실천 모두 독특하다. 2년마다 선출되는 서기가 행정을 맡지만 성직자도 선교사도 없다. 올바로 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선교라고 믿기 때문이다. 무교회 아이디어도 퀘이커에서 나왔다.

퀘이커는 사회운동에 적극적이다. 여성참정권 확보, 노예제 폐지, 월남전 반대 등에도 앞장섰다. 47년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인 AFSC(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는 영국 퀘이커 봉사협회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퀘이커는 몇몇 종교처럼 병역을 거부한다. 퀘이커는 1차 대전 때 군복무의 일환으로 구제사업과 구급차 부대에서 일했고, 2차 대전 때는 병원 근무 등으로 군복무를 대신했다. 군수업체나 미군부대에선 퀘이커를 찾아 볼 수 없다.

'양심적 병역 거부' 논란이 일고 요즘 한국의 퀘이커도 신앙과 국방의 의무 사이에서 '대안'을 찾아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숫자는 적어도 세계 평화에 힘을 보태려는 그들의 선택이 주목된다.

<작가.요가스라마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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