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 리더가 된 이브와 아담의 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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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브가 사과를 한 입 베어 먹고 말한다.

"여보 부끄러워요, 옷을 입읍시다. " 아담이 역시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대답한다. "그래 창피하니 옷을 입읍시다. "

그들은 나뭇잎 한 장으로 중요 부분을 가렸다 (후세 화가들이 이 태초의 복장을 어떻게 알고 그림과 조각으로 남겼는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 세월이 흘러 지금으로부터 약 2백만년 전에 지구상에는 손재주 있는 인간 - 호모 하빌리스 (homo habilis)가 등장했다.

이어 4만년 전에는 지혜의 인간 -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났다.

하빌리스에서 사피엔스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브와 아담은 본격적으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짐승 털가죽을 전신에 두르고 흘러 내리지 않게 덩굴로 허리를 질끈 동여 맨 것이 옷의 시초라고 한다.

세월이 더 흘러 이브는 장관 또는 재벌 부인이 됐다.

아담도 물론 장관 또는 재벌이 됐다.

부티크에선 이들을 통틀어 리더라고 부른다.

리더 이브가 말한다.

"여보 리더는 남과 다르게 입어야 해요. 우리 고급옷을 입읍시다. " 리더 아담이 묻는다. "누가 그럽디까. 또 그 사악한 뱀이 그렇게 말합디까. " "패션 디자이너의 생각이 그렇다고 부티크 주인이 말합디다. 못 입어 잘난 놈 없고, 잘 입어 못난 놈 없다나요. "

"그러면 당신은 패션 디자이너를 죽이시오. 옛날 고승대덕 (高僧大德) 들은 길을 가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답디다. 당신은 크리스티앙 디오르를 만나면 그를 죽이시오. 피에르 카르댕을 만나면 그도 죽이시오. 그것이 진정 남이 아닌 당신 스스로 당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방법이오. 옷이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옷을 만든단 말이오. 그리고 나를 기쁘게 하려면 지난해 패션을 그대로 입으시오. "

"그러나 호랑이무늬 밍크 반코트는 꼭 입어야겠어요. " "뭐 호랑이무늬 외투? 당신이 무슨 호모 하빌리스요? 여자 임꺽정이오? 그렇게 입으면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소. "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부티크 사장이 말하길 '사모님, 우습게 보이는 것이 (looking ridiculous) 바로 올해의 유행입니다' 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입지는 않더라도 왼팔에 걸쳐는 봐야겠어요. " 결국 아담은 졌다.

모든 이브가 털외투를 많이 갖게 된 이유는 이브가 단념하는 속도보다 아담이 지쳐 양보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아담은 좀 더 끈질기게 말렸어야 하는데…. 그 옛날 사과를 먹자고 했을 때도 버텼어야 했는데…. 그러나 '바보 같은 소비' 로 사람을 이끄는 경쟁본능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란다.

과시적 소비는 우월감을 충족시키고, 우월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바보 같더라도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살 수도 있고, 비난을 받으면서도 물질생활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비극은, 고급 옷의 가격이 너무 비싸 리더의 소득으로는 그것을 살 수 없다는 데 있다.

정직한 리더는 고급 옷을 못 입을 팔자라는 것이 이 시대의 숙명이다.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이브들 사이에서는 옷으로 아첨하고 옷으로 뇌물 주고, 드디어는 옷으로 사기 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옷이 의상론의 주제를 넘어 부패론 (腐敗論) 의 주제로까지 됐으니, 아 옷의 타락이여,끝간데를 모르겠구나!

이러면 안된다.

리더는 허위의 옷을 벗어야 한다.

솔기가 없다는 무봉 (無縫) 의 천의 (天衣) 도 거추장스럽다.

초간편 스타일로 된 태초의 옷으로 돌아가야 한다.

솔선하는 사람이 바로 리더라니까 그들부터 입어야 한다.

그러면 이브는 얼마나 아름답고, 또 아담은 얼마나 씩씩할까. 태초의 옷을 입은 그들이 이렇게 외치면 금상첨화 (錦上添花) 일 것이다.

"저희는 보시다시피 리더가 아닌 여러분 앞에 숨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

김성호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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