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읍(揖)하지 않는 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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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장관 한두 사람이 바뀔 때는 그렇지도 않지만 7~8명의 개각이 있으면 언론은 으레껏 세상이 바뀌는 듯이 대서특필한다.

신임장관의 포부를 듣고, 이번 개각에 새 얼굴이 있다, 없다, 전문성이 고려됐다, 안됐다… 등등 개각평도 여러가지로 나온다.

대폭개각이 있다고 정부가 달라지거나 세상분위기가 달라진다면 좋으련만 지금껏 많은 개각에서 보았듯이 그런 것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장관직함을 비서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세크리터리 (Secretary) 라고 한다.

국무장관은 '세크리터리 오브 스테이트' , 국방장관은 '세크리터리 오브 디펜스' 다.

장관은 대통령 또는 총리 (영국) 의 정책을 보좌하고 집행하는 것이지 자신의 독자적 정책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물론 대통령에게 새로운 정책이나 노선 수정을 건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임명될 때 이미 대통령의 정책을 잘 이해하고 잘 따를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발탁되는 것이다.

개각을 국민의 여망에 맞추어 한다면 그것은 정직한 얘기가 아니다.

측근에서 일을 맡겨본 사람, 개인적 인연으로 함께 일해보고 싶은 사람, 또는 주변의 강력한 추천에 따라 사람을 발탁하게 된다.

그 추천자가 공식적인 참모일 수도 있고 비공식적인 실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비서직인 장관이 바뀌는데 왜 관심이 집중되고 무슨 변화가 있을지를 왜 점치는가.

그것은 대통령의 정책과 노선을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또는 미흡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내각에 의해 보완되고 채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정치.행정적 분위기에 어떤 변화를 갈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는 장관에 대해 '비서' 보다는 더 폭넓고 책임있는 역할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장관이 대통령의 기본 정책과 노선을 따라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을 현실적으로 집행하는 과정에서 그 추진속도나 방법, 내용의 우선 순위 등을 조정하고 국민들에게 설득하는 것은 그것대로 중요한 것이다.

또 내각을 한 팀이라고 볼 때 장관 개개인의 컬러나 성향 등이 정부전체의 이미지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장관이 중요한 것이다.

김대중 (金大中) 정부는 개혁을 자임한 정부다.

5.24개각도 개혁을 다지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정부의 개혁정책을 보면 우선 경제의 구조개혁을 통해 외환위기 탈출에 일단 성공했고, 아직 구체적 성과는 없지만 대북 (對北) 정책이 종전과는 다른 축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밖의 분야에서는 무엇이 개혁이고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지 궁금증이 더해가고 있다.

그래서 장관들은 뭘하고 있느냐는 소리도 높은 것 같다.

장관들이 제대로 일을 못한다는 소리가 자주 나온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장관은 한 부처의 장 (長) 이기 전에 국무위원이다.

서류에 도장만 찍는 것이 일이 아니고 국정 전반을 살피면서 국민이 개혁정책을 신뢰할 수 있고 국민이 정부를 푸근하게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김대중정부가 출범한 지 반년쯤 지나서인가.

국무회의를 종전과는 달리 토론의 분위기로 바꾸었다는 홍보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어떤 문제가 어떻게 토론됐다는 얘기는 나온 적이 없다.

대통령의 지시와 지적사항만 밖에 알려지고 있다.

김대중정부가 '국민의 정부' 라면 지시와 지적만이 아니라 토론의 과정이 국민에게 알려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점에서 장관은 단순한 세크리터리가 아니다.

두손을 앞에 모으고 읍 (揖) 을 하는 장관은 국민이 바라지 않는다.

국무회의에서 고성 (高聲) 이 오가도 좋고, 때로는 대통령과 뜻을 달리하기 때문에 장관직을 스스로 물러나는 사람이 있기를 국민은 바라는 것이다.

분란을 바라서가 아니라 맹렬한 토론과 직 (職) 을 건 충언이 있는 내각이어야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엔 대통령과 정책적인 견해차로 스스로 물러난 총리가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도 대통령 지시에 불복 (不服) 할 뜻으로 자퇴한 장관이 있었다.

사람이 열사람 스무사람이면 그중에는 인상이 안좋은 사람, 인기가 덜한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이번 개각을 놓고도 그런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평가는 후에 할 일이다.

대통령 앞에서 읍하는 시늉만 하는 장관은 없는가, 국민에게 하는 얘기도 실은 대통령이 듣도록 염두에 두고 말하지 않는가를 지켜볼 일이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조금이라도 올라가게 일하는 내각인지, 대통령의 총애에만 더 관심을 두며 일하는 내각인지를 지켜보는 일이 중요하다.

김동익 언론인.전 정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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