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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사형대를 박물관으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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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반세기 이 땅에서는 연평균 18명, 총 9백2명이 법정을 거쳐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흉악범과 함께 정치적 살인자, 순수 정치범, 그리고 억울한 희생자가 그 숫자를 채웠다.

최근 10년간도 96명이나 사형당했으니 민주화 단계에 들어선 후에도 사정은 별로 나아진 바 없다.

반면 세계 각국은 사형을 속속 폐지해가고 있다.

모든 범죄에 사형을 폐지한 나라가 57개국, 비군사범죄에 사형을 폐지한 나라가 15개국, 사형집행이 없는 나라가 26개국이니 모두 98개 나라에서 사형이 사라졌다.

한국의 사형 수치는 세계 13위 내외를 기록한다.

인권후진국의 부끄러운 단면이다.

사형은 국가에 의한 계획된 살인행위다.

범죄자의 살인은 대체로 격정상태에서 저질러지지만, 사형이란 제도살인은 법절차에 따라 냉정하게 이뤄진다.

검찰의 구형, 법원의 선고, 법무부장관의 집행명령을 거쳐 교도관의 형집행에까지 사형과정에는 다수의 국가기관이 관여한다.

인권을 으뜸가치로 내세우는 국가가 계획적.체계적 살인을 저지를 때, 그 정당성과 효율성은 거듭 되물어져야 한다.

흉악범들에게 사형은 당연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선량한 시민이라면 나올 법한 반응이다.

전율할 범죄현장과 함께 매스컴에 드러난 흉악범의 상은 황폐한 심정이 극에 달한 '죽어 마땅한' 인간이다.

그러나 옥중에 있으면서 주위의 온정과 배려 속에 인간의 선한 얼굴이 되살아난다.

장기 (臟器) 와 사랑을 함께 남기고 가는 사형수도 적지 않다.

끝까지 개선되지 않는 인간이 있다면, 그 범죄성을 억제하기 위해 무기징역으로 충분하다.

사형으로 살인율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환상이다.

멀리 있는 사형의 위협이 범죄자의 격정을 누르지 못하는 법이다.

범죄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눈앞의 체포와 처벌의 위협이요 정밀한 수사망이다.

사형의 위협이 실감된다면, 그 범죄를 면하기 위한 후속범죄는 더욱 잔혹해지는 경향이 있다.

범죄적 삶의 고리를 끊는 데 사형은 아무 효험이 없다.

사형을 폐지한다고 살인율이 늘지도 않으며, 오히려 살인이 줄어드는 예가 더 많다.

미국의 경우 사형의 살인억제효과를 신봉해 70년대 후반부터 사형건수를 매년 늘려 왔으나 살인사건은 날로 늘어나는 추세다.

사형은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이란 약점을 갖고 있다.

오판 (誤判) 의 가능성 앞에 그 약점은 치명적이다.

재판은 증거의 조각을 모아 유.무죄를 추론하는 것이기에, 언제나 오판 가능성 앞에 열려 있다.

증거로 쓰이는 감정 (鑑定) 자료의 과학적 수준은 종종 의심받는다.

선량한 시민이라고 오판의 위협이 비켜가지 않는다.

실제로 80년대 김시훈 사건, 90년대 김기웅 순경 사건과 같이 과학적 감정을 거치고도 명백히 오판한 사례도 한둘이 아니다.

최근 치과의사의 모녀 살해 피고사건에서 보듯이, 1심에서는 사형판결이 선고됐다가 항소심에서 무죄로 번복된 예도 있다.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감정을 토대로 인간의 생명을 박탈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지나친 오만이다.

반세기 동안 사형은 정치적으로 무척이나 남용됐다.

1공 때의 조봉암, 5.16직후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유신시대 인혁당 관계자들은 지금 시점에서 볼 때 무죄이거나 적어도 사형에 처할 죄는 아닐 것임에 틀림없다.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사형수' 임을 훈장처럼 내세워 국회의원이 됐다.

우리 국민은 사형수로서의 처절하고도 소중한 체험을 가진 인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 대통령은 당연히 인권대통령을 표방했다.

인권대통령이라면 사형에 대한 정치적 결단도 내려야 한다.

민주화로 이행한 나라의 첫 조치 중의 하나가 사형폐지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자신과 함께 세계 3대 인권지도자로 꼽는 만델라와 하벨 대통령은 재임시 사형을 폐지했다.

사형폐지의 결단은 사실 전체 국민의 몫이다.

국민의식을 한순간의 조치로 바꿀 수는 없다.

전면폐지가 당장 어렵다면 사형집행을 몇 년간 유예하는 선언을 한 뒤 국민적 공론화를 통해 완전폐지에 이르는 단계적 방책도 추진할 수 있다.

로마 교황청은 적어도 2000년 한해만은 전세계에 사형집행을 보류하자고 호

소하고 있다.

법무부장관이 사형집행명령을 보류하는 것도 현실적 방법일 것이다.

파리의 센 강변을 따라 조성된 노점에서는 한때 세인을 전율케 했던 기요틴

의 모형을 판매하고 있었다.

독일의 로텐부르크 시는 지난 날의 사형과 고문도구를 진열해 놓은 형벌박물관으로 이목을 끈다.

언제쯤일까. 한국의 사형도구들이 박물관에 전시되고, 사형장이 가상 공포체험관으로 재단장할 그 날은.

한인섭 서울대 법대교수. 형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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