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전통 옹기 9대 이학수씨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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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8대 300여년 간 내려온 가업을 자신의 대에서 끊으려 했다. '옹기쟁이'라는 천대를 외아들에게 물려주기 싫어서였다. 그래서 아들을 서울의 번듯한 사립대에 보냈다. 1970년대 초의 일이었다. 아들도 대학에서 국어 교사의 꿈을 키워갔다.

74년 늦은 봄. 서울에 있어야 할 아들이 전남 보성의 집에 나타나 "가업을 잇겠다"고 했다. 아버지의 답은 "네 손에는 흙을 묻히지 않으려 했건만…. 차라리 너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집에 눌러앉은 아들과 아버지 간에 반년쯤 냉전이 계속됐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던가. 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옹기들을 한번 내다 팔아봐라."

전남 보성의 미력옹기(www.ongki.com) 대표 이학수씨(51.사진)의 9대째 가업 잇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서울에 있어도 독을 빚으며 나무로 흙을 두들기던 소리가 귓전에 탕탕 울리고, 가마의 장작 불빛이 눈앞에 어른거리더군요. 그래서 학업을 접고 집으로 간 거지요."

1년간 옹기 팔기만 한 뒤에야 그릇 빚는 물레에 앉았다. 따로 기술을 배우지 않았건만, 어려서부터 본 게 그것이어서인지 옹기가 술술 빚어졌다고 했다.

70년대 말 ~ 80년대 초에는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 그릇에 밀려 생활이 안될 정도였다고 이씨는 회상했다. 궁여지책으로 보성 읍내에 안경점을 내서 돈을 벌고, 새벽과 밤에 옹기를 빚었다. 낮엔 '안경', 밤엔 '독'짓기, 일종의 '주경야독'이었다며 그는 웃었다. 그러다 90년대 들어 우리것을 찾는 손길들이 이어지며 안경점은 접고 옹기에만 전념하게 됐다. 만드는 곳이 미력면이어서 '미력옹기'라 불리던 것을 아예 브랜드로 내세웠다. 현재는 옹기 만드는 직원 13명을 거느리고 있다.

이씨는 지금도 전통적인 방법 그대로 옹기를 만든다. 그릇을 빚어 2 ~ 3일 말리고, 유약을 칠한 뒤 열흘 가까이 가마에서 굽는다. 흙은 공방 바로 뒷산의 것을 쓰고 가마에는 소나무 장작을 지핀다. 유약은 흙과 소나무 잿물을 섞어 만들어 한번만 바른다.

"화학약품을 바른 옹기는 숨을 쉬지 않아요. 그러면 김치든 곡식이든 쉬 상하지요."

2남 1녀 중 두 아들은 영국에서 신학을, 딸은 독일에서 피아노 공부를 한다. 자식들 스스로 옹기와는 다른 길을 택했다. 그런데도 매년 겨울방학이면 삼남매 모두 집에 와서 두달 정도씩 옹기 일을 배운다고 한다.

"재작년에 별안간 큰아들 놈이 '제가 옹기하겠다고 아버지처럼 갑자기 보따리 싸들고 오면 받아주시겠어요'라더군요. 10대까지는 이어질 것 같습니다."

보성=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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