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 오폭 파장 미.중.유고 지도자 3인 3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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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 진땀난 클린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코소보 늪에 빠져 진땀을 빼고 있다.

뜻하지 않은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 폭격사건을 만나 잠잠해 있던 중국의 분통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 틈을 이용, 밀로셰비치는 코소보내 유고군 철수라는 얄미운 (?) 발빼기 카드를 내놓아 클린턴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클린턴으로선 중국의 '몰아치기' 식 외교전술에 대처하는 한편으로 코소보사태를 명분있고 모양새 좋게 마무리해야 하는 이중고를 짊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중국 무마하기만도 간단한 노릇이 아니다.

9일 중국에 유감을 표하고 친서까지 보냈으나 중국의 계속되는 거센 압력 앞에 10일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거듭 공개사과를 했다.

뿐만 아니라 같은날 조 록하트 백악관 대변인을 통해 장쩌민 주석에게 전화회담을 통해 직접 사과할 용의도 있다고 밝혔다.

또 그동안 군사목적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다며 대중국수출을 보류했던 인공위성 통신기술을 중국에 공여하겠다고 의회에 통보했다.

선물까지 동원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앞길에는 난관이 많이 남아 있다.

중국의 공세가 고단수이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군사대화 등을 거부한 데 이어 장쩌민 주석은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유고공습 중단 없이는 유엔안보리의 코소보 평화논의도 없다" 고 위협했다.

게다가 유엔 안보리의 코소보 평화안 처리를 통해 유고전쟁을 신속히 끝내기 위해서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러시아의 협조가 절실한 처지다.

때문에 클린턴은 당분간 사과를 거듭하는 등 중국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줄 수밖에 없게 된 처지에 빠졌다.

이 때문에 그동안 중국에 대해 휘둘러온 '인권' 이라는 전가의 보도도 중국을 달래는 차원에선 당분간 칼자루 속에 조용히 담아놓을 수밖에 없게 됐다.

채인택 기자

◇ 치고 빠지기 밀로셰비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 대통령이 또 한번 선수 (先手) 를 쳤다.

코소보에 주둔중인 유고군 병력의 부분 철수라는 고단수의 '치고 빠지기' 작전을 구사한 것. 이는 중국 대사관 폭격이라는 최악의 실수로 수세에 몰려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에 대해 공습중단 압력을 배가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병력 철수는 나토가 제시한 공습중단의 핵심적 전제조건이다.

유고는 병력 철수가 9일 이미 시작됐다고 밝혔다.

공습 때문에 철군이 방해받고 있으며 공습을 중단하면 병력 철수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확한 철수병력 규모는 언급하지 않았다.

나토측이 파악하고 있는 코소보 주둔 유고군 병력은 4만명 수준. 그러나 유고는 무장 군.경 병력이 15만명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다.

유고측은 유엔군의 코소보 배치 합의가 이뤄지면 평화시 수준 병력으로 축소가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습 이전 코소보에는 1만2천명의 유고군 병력이 머물러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밀로셰비치의 이같은 유화제스처는 러시아의 즉각적인 환영을 이끌어 냈다.

유엔도 '긍정적인 진전' 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나토측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나토는 유고군의 부분철수 선언을 ▶코소보해방군 (KLA) 과의 일방적 휴전 선언 ▶미군포로 석방 ▶이브라힘 루고바의 출국 허용 등과 마찬가지로 밀로셰비치의 시간끌기 작전으로 분석하고 있다.

공습을 완화시켜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인종청소를 마무리할 시간을 벌겠다는 것이다.

미 국무부는 현재 코소보 알바니아계 주민의 90% 이상이 처형되거나 추방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훈범 기자

◇ 흐뭇한 장쩌민

유고사태의 최대 승자는 중국 장쩌민 (江澤民) 주석이라는 평가가 새롭게 나오고 있다.

그만큼 대사관 오폭 (誤爆) 사건 후 江주석의 대내외 입지는 강화됐다.

江주석은 우선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연 사흘째 '중국 국민과 지도부에 대한 사죄' 를 받아냈다.

수위도 8일 사건발생 후 공식사과 의사표현에서 다음날 '불행한 실수' 였음을 인정하는 친서로, 이어 10일에는 "클린턴 대통령이 장쩌민 주석과 전화회담을 통해 직접 사과할 용의가 있다" 고 백악관이 발표하는 단계로 높아졌다.

미국 대통령이 사흘을 내리 잘못했다고 빈 것은 극히 예외적이다.

미국의 사죄 외에도 이번 사태로 江주석이 챙긴 실익은 적지 않다.

인권시비와 세계무역기구 (WTO)가입, 전역미사일 방위 (TMD) 시스템 분쟁, 핵기술절취 논란 등 각종 현안에서 미국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됐다.

코소보 문제에서도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만일 이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오게 될 경우 江주석에게는 최대의 외교적 승리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천안문사태 10주년을 앞두고 동요조짐을 보이던 내부정세가 반미 (反美) 와 국력강화를 기치로 단합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면서도 그는 직접 대미 공격의 악역을 맡지는 않았다.

그가 이번 사태와 관련해 한 발언 가운데 공개된 것은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의 전화통화 내용 정도다.

"미국의 포함 (砲艦) 정책은 즉각 중지돼야 한다" 는 원론적 발언만 가지고 화려한 성과를 거둔 모양이 되는 것이다.

이같은 직접적인 대미공격 자제로 江주석은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불가결한 대미 관계개선의 여지도 남겨놓을 수 있게 됐다.

이제 江주석은 더 이상 미국을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현명치 않다고 판단한 것 같다.

중국의 방송들은 10일 밤을 기해 시위장면을 내보내지 않고 있다.

대신 미국과 나토지도자들이 사과했다는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김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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