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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생에 “가슴 보여줘” 문자 97회…사이버 스토킹 4년 새 3배로 급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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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여대생 이모(25)씨는 지난달 10일 e-메일을 열어보곤 깜짝 놀랐다. “당신의 나체 사진을 인터넷에 뿌리겠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정체불명의 네티즌은 “300만원을 달라”는 요구도 덧붙였다. 이런 메일은 이달 초까지 35차례나 계속됐다. 이씨는 컴퓨터를 켤 때마다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이씨는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메일 계정 등을 추적한 끝에 서대문구에 사는 김모(26·무직)씨를 붙잡아 ‘사이버 스토킹을 한’ 혐의(정보통신망법 위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인터넷에 돌던 이씨의 학생증 사진 등을 입수한 뒤, 정보검색을 통해 메일주소·인적사항까지 알아내 계속 메일을 보냈다”고 말했다.

‘사이버 스토킹’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e-메일과 인터넷 쪽지, 휴대전화 등으로 글·사진을 반복적으로 보내 공포에 떨게 하는 범죄가 사이버 스토킹이다.

15일 경찰청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정갑윤(한나라당) 의원에게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경찰에 적발된 사이버 스토킹은 2005년 333건에서 지난해엔 1018건으로 급증했다. 올해는 상반기까지만 566건을 돌파했다. 명예훼손이나 협박공갈 같은 다른 사이버 범죄에 견줘 증가세가 가파르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은 ‘보이지 않는 범죄자’가 일으키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컴퓨터·휴대전화를 통해 ‘항상 감시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경찰대 표창원(범죄심리학) 교수는 “사이버 스토킹이 현실의 범행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면서 피해자들이 큰 공포를 느낀다”고 말했다.

회사원 송모(26·여)씨가 그렇다. 그는 요즘 낯선 남성에게서 지속적으로 인터넷 쪽지를 받고 있다. 남자는 지난해 말부터 거머리처럼 송씨의 미니홈피에 들러붙었지만 송씨는 그와 일면식도 없다. 상대는 “31세 남성”이라며 이름도 밝히곤 “홈피 사진을 보고 호감이 생겼다. 만나자”고 끈덕지게 요구해왔다. 송씨는 “남자가 ‘만난 지 100일’이라는 쪽지를 보냈을 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며 “홈피에 들를 때마다 가슴이 뛴다. 경찰에 신고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경찰은 사이버 스토킹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번진다는 점을 우려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주요 대상은 유명인이었다. 2005년 강모씨라는 네티즌으로부터 끊임없는 구애의 글을 받은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 관계자는 “3년 전만 해도 일선 경찰서에 사이버 스토킹 신고가 한 달에 1건 정도에 불과했지만 최근에는 5~6건으로 늘었다. 거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컴퓨터 사용에 친숙한 10대들도 사이버 스토킹의 유혹을 받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중학생 차모(15)군은 채팅 사이트에서 알게 된 조모(14)양에게 “가슴을 보여달라”는 문자메시지를 일주일간 97회 보냈다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양은 한동안 수치심과 두려움에 떨다 고민 끝에 부모에게 알려 위기를 벗어났다.

사이버 스토킹이 급증하지만 처벌을 위한 별도 법 조항은 없다. 일단 정보통신망법 74조에 따라 공포심을 유발하는 문언·화상 등을 반복적으로 상대에게 전달하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그러나 신변을 위협하는 등의 협박이 없다면 불구속으로 벌금을 낼 때가 많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김은경 박사는 “미국·일본에선 ‘사이버 스토킹’ 관련 법이 이미 만들어졌다”며 “한국은 아직 사이버 스토킹의 개념도 합의되지 않은 상태”라고 밝혔다.

이정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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