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유엔, 한국을 떠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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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정부는 올해 말을 기해 반세기 동안 펼쳐온 유엔의 국내활동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을 고려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63년부터 한국에서 활동해 온 유엔개발계획 (UNDP) 이 한국에서 철수하게 된다.

국내에 대표부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유엔기구인 UNDP는 유엔기구 중 가장 방대한 기구로 한국에서 유엔본부와 전 유엔조직의 주한 '대사관' 역할을 해 왔다.

UNDP 철수를 지지하는 정부 일각에서 내놓고 있는 이유는 한국이 이제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까지 가입한 선진국이 되었기 때문에 개발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UNDP가 더 이상 존속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럴 듯한 논리지만 이러한 이유로 유엔기구 대표부를 한국에서 철수시킨다는 것은 국제적 추세에 역행하는 길이며 국익을 위해서는 더욱 바람직하지 못

한 일이다.

한국은 유엔과 48년 정부수립 이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가져왔다.

유엔의 중요한 기능인 선거관리 및 감시가 유엔 사상 처음으로 한국에서 이뤄졌으며 (47년) , 유엔군의 한국전 참전으로 본격화된 유엔의 한국내 활동은 긴급원조 및 복구사업.개발원조 단계를 거쳐 두만강 유역 개발, 한국의 유엔평화군 참여 등과 같은 상호협력으로 발전해 왔다.

한국과 유엔의 관계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91년) 이후 더욱 강화되고 다변화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정부를 비롯한 시민단체.언론.학계 등과 유엔기구들의 접촉은 더 빈번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늘어나는 대 (對) 유엔활동의 창구역할 이외에도 주한 유엔대표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아직도 전쟁상태에 있는 한반도에 긴급사태가 발생할 경우 우리는 서울과 평양에 대표부를 가진 유일한 국제기구인 UNDP를 대화의 통로로 사용할 수 있다.

유엔기구의 입장에서는 현지에 파견돼 있는 유엔대표의 직접보고가 한국정부나 우방이 알려오는 소식보다 더 신빙성이 있을 것이다.

또한 통일을 전후해 예기치 않은 대규모의 피난민 수용이나 인권유린 문제 등이 야기된다면 유엔기구 및 국제기구들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정부와 직접 접촉을 꺼리는 북한이 그나마 유엔을 통한 협력문제에는 응해오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물론 아직도 한국에는 유엔군사령부라는 깃발을 주한미군이 사용하고 있지만 이제는 피차 아무런 사무적 관계도 없다.

다시 말해 UNDP대표부가 철수하면 한국은 국내에 있는 유엔의 유일한 창구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경제적으로 선진국이 되었다고는 하나 인간개발의 척도로 보면 아직도 여러 분야에서 뒤져 있는데, UNDP는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 및 여러 관련 기관들과 효과적인 연대를 모색하며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 지위향상.장애인 권익보호.부정부패 척결.환경보호 분야 등의 발전을 위해 우리는 유엔기구들을 통한 국제적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

셋째, 소위 선진국의 수도에 유엔기구의 본부나 지역대표부, 아니면 최소한 연락사무소가 없는 곳이 없고 각국은 서로 이들의 유치를 위해 후한 조건을 내걸며 경쟁하고 있다.

국제기구의 대표부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위상과 연관돼 있다는 의식과 함께 그 내면에는 실리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유엔은 미국의 분담금 체납으로 악화된 재정난 속에서도 60여개국에 설치돼 있는 유엔공보관을 하나도 철수하지 못하고 있다.

유엔 공보관을 가지고 있는 나라마다 외교적 압력과 재정지원 등의 공세로 이들을 붙잡아 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이 안보리 이사국을 지낸 폴란드의 경우 안보리 진출확정을 계기로 외교력을 동원해 바르샤바에 유엔 공보관 신규설립에 성공했으며 일본은 유엔 공보관의 활동비까지 부담하며 일본 주재 유엔기구들의 확충에 힘쓰고 있다.

한국 UNDP의 경우 오히려 UNDP쪽에서 대표파견에 필요한 경비는 계속 부담할 터이니 그외 건물임대.활동비와 현지 한국인 직원 보수 등을 한국정부가 책임지는 방법을 제의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여 하루 속히 UNDP대표부의 존속에 합의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서울에 유엔 공보관을 유치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이러한 노력은 향후 유엔기구의 아시아 지역대표부 또는 본부 자체를 한국에 세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구삼열 유니세프 특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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