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밀레니엄 작가] 3. 가즈오 이시구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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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영국색 짙은 영화 '남아있는 나날' 의 원작은 가즈오 이시구로 (45) 의 동명소설. 1950년대를 배경으로 전형적인 영국귀족 가문의 충직한 집사 스티븐스의 회고담을 그린 이 소설이 일본인의 작품이라고 짐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일본혈통임에 틀림없지만, 일본이 아닌 영국 문학계의 당당한 주역이다.

개인사와 집단의 역사를 섬세한 회상의 피륙으로 짜나가는 그의 솜씨는 이미 세계적으로 독자를 확보한 터. 영국문학계는 '남아있는 나날' 에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주었다.

일본 나가사키 태생의 가즈오가 부모를 따라 영국에 건너간 것은 여섯 살 때. 애초에는 일본에 돌아가 살 예정이었던 터라 그의 부모는 일본의 문화며 생활습관을 꾸준히 가르쳤다.

82년 발표한 첫장편 '창백한 언덕풍경 (A Pale View of Hills.국내 미번역)' 은 딸의 자살 이후 영국에 혼자 사는 일본여성 에츠코의 회상으로 세계대전의 와중에 황폐한 일본의 현실을 녹여냈다.

86년 두번째 장편 '떠도는 세상의 예술가' (예문) 역시 노년의 화가 마스지 오노의 회상속에 이야기가 전개된다.

일본의 패전 직후인 1940년대말. 마스지는 단아한 고택에서 한적한 노년을 보내는 명망있는 화가인양 싶지만, 둘째딸의 혼인이 번번이 어그러지는 현재의 사건 속에서 그가 전시 일본의 군국주의에 협력하면서 예술적 재능을 낭비했던 과거가 드러난다.

작가가 주목하는 역사의 대목이 어디인지는 89년작 '남아있는 나날' (세종)에서도 확인된다.

주인공 스티븐스가 충직한 집사로 평생을 모셔왔던 달링턴 공이 실은 나치의 협력자였던 것. 작가는 서술의 주체인 주인공들이 기억하는 과거와, 독자가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과거 사이에 거리를 두면서 1인칭 소설의 묘미를 이끌어낸다.

가장 최근작인 95년의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프레스21)에서 작가는 상상력의 지평을 더한층 넓힌다.

동부유럽의 한 익명도시를 연주회차 방문한 피아니스트 라이더의 초현실적 체험을 빌어 작가는 현대인의 불안과 연계된 예술가의 존재론을 탐색한다.

가즈오의 매력은 단지 그가 유럽과 일본을 넘나드는 다문화체험의 소유자란 것 때문이 아니라, 이를 현대의 보편적 문제로 구체화하는 솜씨에 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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