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미륵사지 석탑 해체 복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 왕이었던 30대 무왕은 쇠잔해가는 백제의 국운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 수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한편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라의 서쪽 변방을 여러 차례 침공했다. 신라에 대한 무왕의 경쟁의식은 불사 (佛事)에서도 나타났다.

무왕은 신라가 경주에 짓고 있던 황룡사를 능가하는 미륵사를 짓기 시작했다.

황룡사는 진흥왕 때인 553년 공사가 시작돼 선덕여왕 때인 645년에 완성됐다.

특히 9층 목탑은 불력 (佛力) 으로 이웃 나라들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하는 의도에서 세워졌다.

미륵사는 무왕의 출신지인 익산에 세워졌다.

전체 규모는 황룡사와 비슷했지만 강당 (講堂) 은 황룡사의 그것보다 훨씬 컸다.

특히 황룡사가 3개의 금당 (金堂) 을 세우고 중앙 금당 앞에 목탑을 세운 '1탑 3금당' 형식이었던데 비해 미륵사는 좌.우 금당 앞에 석탑을 하나씩, 중앙 금당 앞에 목탑을 세운 '3탑 3금당' 형식이었다.

황룡사는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까지 왕실의 보호를 받았던 호국사찰이었으나 1238년 몽골 침입때 불타버렸다.

미륵사는 백제가 멸망한 후 몰락했으며, 그후 명맥을 유지하다가 조선 중기에 폐사 (廢寺) 되고 말았다.

지금은 옛 절터에 서쪽 석탑 (국보 제11호) 과 당간 (幢竿) 지주만 남아 있다.

미륵사지석탑은 중국에서 전래된 목탑 양식을 석재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은 6층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9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유물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술사학자 고유섭 (高裕燮) 은 일찍이 미륵사지 석탑을 '한국 석탑 양식의 시원 (始源)' 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서서히 붕괴돼왔다.

특히 1915년 크게 붕괴된 것을 일본인들이 한쪽 면을 시멘트 콘크리트로 만들어 버텨왔다.

그후 세월이 흐르면서 콘크리트와 탑석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콘크리트마저 부식돼 탑 전체가 언제 붕괴될지 모를 위기에 처했다.

그동안 학계에선 해체 복원 주장과 현상태 보존 주장이 팽팽히 맞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 정부는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복원하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흉물스런 콘크리트도 걷어낼 수 있게 됐다.

21세기 첨단기술과 백제 장인들의 솜씨가 합쳐져 미륵사지 석탑이 1천3백50년전 웅장했던 본래 모습으로 되살아나길 기대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