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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9. 문지학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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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문지학교' 란 1970년 계간지 '문학과 지성' 이 창간된 지 몇 년 후 시인 황동규씨가 '문학과 지성사' (이하 문지) 를 일컬어 지은 이름이다.

문단의 '4K' 로 불리는 서른 안팎의 네 청년 김병익.김주연.김치수.김현을 비롯 문지 중심으로 모여들던 쟁쟁한 문인들의 모습을 시인은 그렇게 표현했다.

여기서 '학교' 란 본래 학파의 의미가 강하지만 새로운 세대를 재생산해내는 뜻도 포함된다.

문지는 한국 문단의 한 학파로, 또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양산한다는 학교의 의미로도 부합한다.

특히 세대를 이으며 쌓아온 문학적 역량이 전해지는 모습은 더욱 그렇다.

어느덧 서른에 이른 문지학교는 이제 변화의 길목에서 본격적인 세대교체를 맞고 있다.

문지의 변화는 곧 우리 문단 지형도의 변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작과 비평사' 와 더불어 7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의 진실과 사회적 현실의 상관관계를 탐구한 대표적 문학집단이기 때문이다.

문지의 산 역사인 김병익 (金炳翼.62) 사장은 내년 초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의사를 이미 내비쳤다.

이는 '문학과 지성' 으로 상징되는 문지 1세대의 퇴장과 문지2세대의 전면부상을 뜻한다.

문지2세대는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등단한 문학평론가들로 1세대의 제자들이 추죽을 이룬다.

서울대 불문과 교수를 지낸 김현 (본명 金光南.작고) 의 제자로 이인성 (李仁星.47.서울대 불문학).권오룡 (權五龍.48.한국교원대 불문학).정과리 (본명 鄭明敎.42.충남대 불문학) 교수가 있다.

80년 계간 '문학과 지성' 봄호로 등단한 이인성은 '낯선 시간 속으로' 등의 소설을 통해 치열한 문체의식과 독자적인 형태실험을 계속 추구하는 소설가.

권오룡은 구조주의를 바탕으로 균형잡힌 평론을, 정과리는 김현의 감각을 이어받은 분석적 평론으로 이름 높다.

이들과 함께 문학적인 교양과 실증주의를 바탕으로 날카로운 평론을 하고 있는 홍정선 (洪廷善.47.인하대 국문학) 교수와 80년대 민중문학과의 비판적 대화에서 최근 포스트이론과의 비판적 대화로 화두를 옮긴 성민엽 (본명 全炯俊.44.충북대 중문학) 교수도 2세대의 주축.

이들은 80년 신군부에 의해 '비판적' 이란 이유로 '문학과 지성' 이 폐간되자 1세대 동인들의 신임아래 무크지 '우리 세대의 문학' (82년) 을 간행, 활동한다.

'우리 세대의 문학' 은 88년 현재의 '문학과 사회' 로 거듭 태어난다.

앞으로 이들은 '문학과 사회' 편집에서 단행본 출판 기획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게 된다.

이에 따라 문지의 단행본도 새 흐름에 맞게 변모될 전망. 이데올로기의 시대에서 문화의 시대로 변화하는 흐름을 읽고 있는 이들은 우선 금기시해오던 번역소설에도 관심을 기울이는가 하면 아동.청소년 도서에도 참여한다는 구상이다.

또 다양한 교양물과 자연과학서도 아우를 예정이다.

90년 문지의 편집부장으로 합류한 시인 채호기 (蔡好基.43) 주간도 문지를 이끄는 한 축이다.

김병익 사장은 " '문학과 사회' 동인들이 문지의 주체가 되면서 채 주간은 출판사 운영을 계속 맡을 것" 이라고 말해 채주간의 경영권 위임을 암시했다.

'문학과 사회' 동인들이라 '문사세대' 라고도 불리는 이들 2세대를 논하며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5년째 매주 금요일 저녁 술자리를 하는 홍대앞 술집 '예술가' 다.

문사세대들의 모임에 다른 술자리란 없다.

매주 이곳에서 시작해 이곳에서 끝을 낸다.

예술가에서 그들은 후배들을 다독이며 문사의 담론을 생산하며 문인들과는

사귐을 나누는 장소로 그에 대한 애정은 집착 (?)에 가까울 정도다.

최근 문단의 주목받는 30대 젊은 문학평론가 이광호 (李光浩.37.서울예대 문창과).우찬제 (禹燦濟.38.서강대 국문학) 교수의 영입은 문지의 변화를 명징하게 하는 대목이다.

두 평론가는 90년 문지에서 발행한 '비평의 시대' 동인으로 활동, 처음 문지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이전까지 민음사가 펴내는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는 점과 서울대 출신이 아니라는 부분은 문지가 그 동안 걸어온 행보와는 다른 모습으로 문단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두 평론가와 함께 박혜경 (朴惠涇.40.명지대 교양학부).김동식 (金東植.33.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씨가 문지3세대를 이루는 형세다.

이들 젊은 평론가들은 앞으로 '문학과 사회' 의 편집을 담당할 주축들. 따라서 '문학과 사회' 도 큰 변화를 가져 올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문지가 문학에서 문화로 그 영역을 넓힌 시도는 '이다' 동인으로부터 비롯된다.

문학만을 고집하던데서 미술.영화.패션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는 시인이자 대중음악평론가.MTV VJ 등의 이름이 붙은 성기완 (成耆完.33) 씨가 94년 등단하고 과학평론가 주일우 (朱一尤.33) , 소장 철학자 김재인 (金在寅.31) 씨 등이 문지 주변에 모이면서 95년 겨울 '이다' 동인 모임을 결성, 96년 무크지 '이다' 1호를 내면서부터다.

현재 4호 준비중. 이인성 교수는 " '이다' 는 문지의 새 피 같은 존재로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작업의 일환이자 매체 다변화의 한 형태" 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70년 여름 "계간지를 만들자" 며 김병익을 찾아온 김현. 이 장면은 문단내에서 현실 변혁에 관심을 둔 참여파들이 모인 '창작과 비평' 이 기세를 올릴 즈음 문학의 틀 안에서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이들의 활동무대가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여기에 김치수 (金治洙.60.이화여대 불문학) 교수가 합류하고 작고한 인권변호사 황인철 (黃仁喆) 씨가 후원을 맡아 70년 9월 첫 호를 낸다.

그 후 75년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 가 정식 설립되고 시인 황동규.정현종.오규원.김광규.황지우, 소설가 최인훈. 이청준. 김원일.홍성원.조세희.복거일.신경숙씨등 문단의 거목들을 배출한다.

김병익 사장은 "1세대들은 대학에서 4.19를 맞았고 한글로 교육받은 첫 세대로 자유와 지성에 대한 고민이 끊임었는 화두였다" 며 지난 시절을 돌아본다.

그들로부터 다시 한 세대. 1세대의 화려함 뒤로 2세대가 본격적인 주축으로

떠오르고 3세대와 '이다' 동인들이 뒤를 받치는 문지. 한때 독특한 엘리티즘으로 혹은 출판에 대한 순교자적 고집으로 대중사회의 큰 흐름에 끼어들기를 거부해, 몸부림치는 정신적 공룡이란 칭호까지 가졌던 문지가 새로운 변신을 통해서 어떤 귀착점에 이를지 주목되는 대목이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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