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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한반도 '봄'의 조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올해도 산마다 진달래가 많이 피었다.

산 전체를 불태우듯 정겹게 피어 있는 진달래 군락지에서 올해는 진달래가 유난히도 붉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몇년전 북한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북한의 나진.선봉지구의 어느 야산에서 마침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진달래를 보며 지친 여정을 아득히 달래고 있었다.

그때 평양에서부터 동행한 북한측 인사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건네왔다.

"진달래는 북쪽 진달래가 남쪽 진달래보다 더욱 붉디요?" 나는 무심코 대답한다는 것이 그만 감상적이 되고 말았다.

"남쪽 진달래도 북쪽 진달래가 그리워 많이 붉어졌답니다. " 말 끝부분에서 끝내 울먹이고 말았고 북측인사도 몇번이나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진달래 이야기로 함께 눈물을 흘렸던 두 사람은 북한 여행을 하는 동안 꽤 친밀해졌다.

그런데 그후 일본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서 우연히 그 북측 인사를 다시 만나게 됐다.

나는 수년 전의 추억을 연상이라도 시키려는 듯이 물었다.

"북쪽 진달래도 남쪽 진달래가 그리워 더욱 붉어졌겠지요. " 그러자 그는 쓸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진달래가 남아 있나요. 배가 고프니 보는 족족 먹어 치워버리는데…. " 나도 어렸을 때 산에서 배가 고파 진달래 꽃잎을 따먹었던 생각이 났다.

특히 6.25 피난 시절, 산길을 도망가다가 진달래 꽃잎 한 소쿠리 따다가 허기진 배를 채운 적도 있다.

그때 밥이 얼마나 귀하고 맛있는 것인가를 처음 느꼈다.

나는 북측 인사의 그 말을 들으며 또 몇번이고 눈시울을 적셨다.

언젠가 나는 한 문화재수장가의 수장품에서 17세기 풍속화를 본 적이 있다.

산골 냇가에 젊은 아가씨들 서넛이 둘러앉아 빨래를 하는데, 머리에는 모두 진달래 꽃가지를 꽂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산길에는 총각들 서넛이 지게 가득히 나무를 지고 오는데 그 위에는 또 진달래꽃을 잔뜩 꽂아 놓고 있는 그림이었다.

전통사회의 평화로운 봄풍경을 진달래꽃에 맞추어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어 그 그림에 도취해 주는 대로 술잔을 받아 마시다가 그만 울먹이고 말았다.

지금의 폭력과 공해 (公害) 문명의 한복판에서 느끼는 '내가 잊었던 고향의 봄' 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달래를 보면 즐겁고, 낭만적이기까지 한 것이 당연할텐데 어찌 우리는 안타까운 울음을 울어야 하는가.

북한의 영변과 금창리는 진달래로 유명한 곳이다.

그곳에 북한의 핵시설이 들어서고, 북의 핵개발을 억제하려는 미국 핵정책의 결과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KEDO)가 이루어지고, 한국은 대북 경수로공사 비용의 약 70%를 떠맡았다.

한반도문제 해결정책으로 KEDO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국의 핵확산금지정책의 일환으로 KEDO가 이루어졌는 데도 비용의 대부분을 한국에 떠맡겼다.

그런데 며칠전 다시 분담금의 상환을 KEDO가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국가가 상의해 보증한다는 식으로 바꾸어 사실상 분담금을 돌려받기 어렵게 됐을 뿐만 아니라 미국 분담금은 한국이 돌려줘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돼버렸다.

영변의 진달래가 통곡할 일이다.

우리는 한국의 비핵화가 북의 비핵화로 연결되고 그것이 일본의 비핵화로 확대되고, 중국과 러시아의 동북아지방에서의 비핵화로 확대돼 결국 동북아 비핵지대화로 확대되는 모델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이 진달래의 웃음의 조건이 아닐까. 정부는 햇볕정책을 추진하며 '동북아냉전구조의 해체' 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동북아는 냉전구조의 해체구도라기보다는 오히려 냉전후의 미.일군사동맹의 개정을 의미하는 '가이드라인' 과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전역미사일방위 (TMD) 체제구상이 나오고 이에 대한 중국.러시아 및 북한의 반발로 동북아의 신냉전이 전개되고 있고, 그 일환으로 한.미군사협력에 덧붙여 한.일군사협력이 강화되고 있다.

수일내로 일본 국회에서 가이드라인 관련법안이 통과될 형국이라는데, 한반도의 운명과도 직결될 중대한 사안을 두고 우리는 이렇게 '강건너 불' 처럼 가만히들 있는가.

동북아 신냉전구도의 형성조짐 앞에 삼천리 강산의 진달래들이 어찌 소리없

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반도에서 진달래의 눈물이 아닌 진달래의 웃음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김영호 경북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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