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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판, 징하요 (3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31) '만다라' 촬영

'짝코' 에 이어 '우상의 눈물' '만다라' 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을 내면서 나는 80년대를 맞이했다.

또 다른 내 영화인생의 시작이었다.

60년대의 액션 사극 감독에서, 70년대의 우수 영화 감독을 거쳐 바야흐로 나는 80년대 '작가' 로서의 성숙을 위한 자기선택의 결단을 면밀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 첫번째 결실이 '만다라' 였다.

김성동씨의 원작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내 자신이 느낀 감흥을 화면에 넣기에 가장 적절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자기완성으로 가는 과정, 자기 목적을 위해서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가 충격적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물론 나는 불교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들기까지는 여러가지로 애를 먹은 작품이다.

영화화를 위한 교섭부터 난항에 부딪혔다.

이 문제를 간신히 해결하니까 이번엔 촬영할 절을 빌릴 수가 없었다.

소설로 나왔을때부터 조계종단을 자극했던 터라 영화화에 대한 반발이 심했다.

아무리 픽션으로 꾸몄다지만 일부 승려들의 잘못된 수행생활이 전체 불교계를 왜곡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 조계종단 등 불교계의 주장이었다.

소설이 나온 것도 속상한데 영화까지 만든다니, 불쾌감이 클 수 밖에 없었다.

조계종은 산하의 모든 사찰에 '만다라' 의 '만' 자만 나와도 출입금지를 시키라는 엄명을 내렸다.

당시 우리를 도와주는 스님중에 평상스님이라는 분이 있었다.

상황이 워낙 어렵다보니 스님은 "도저히 조계종 산하의 절은 안되니 태고종 고찰중에 전남 승주에 선암사라고 있는데 그곳에 가서 부탁하면 어떻겠냐" 고 나에게 귀뜸해줬다.

만약 여기서도 안되면 '만다라' 는 못찍는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그곳을 찾았다.

천만다행으로 우호적이었다.

지허스님이란 분이 큰 도움을 주었다.

이때 평상스님이 종단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우리를 도우려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불교를 잘 모르는 우리가 혹시라도 오류를 범해 자칫 왜곡되게 표현하지 않도록 고증을 해주려는 순수한 뜻에서였다.

이제 촬영이 시작돼 선암사에서 대부분을 찍기는 했지만 고민이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제 아무리 촬영각도를 달리해도 한곳에서만 영화를 찍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은밀한 '사찰물색' 이 시작됐다.

전북에 있는 내소사에 가서는 "문화영화를 찍으러 왔다" 고 둘러대고 몇 커트를 찍었다.

한겨울 월정사에 가서는 일주문 앞에서 바들바들 떨다가 인적이 없을 때 부리나케 찍고 걸음아 나 살려라며 제작진이 철수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만다라' 를 통해 좋은 연기자 한명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연극배우 출신의 전무송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나는 그를 처음 보는 순간 '적역' 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중 촬영기간 내내 희죽희죽 뜻모를 웃음을 웃길래 이유를 알아봤더니, 그는 66년 개봉된 내 영화 '전쟁과 여교사' 에 이미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15년만에 만났으니 내가 어찌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겠는가.

정일성 감독이 촬영한 '만다라' 의 영상미는 참으로 훌륭했다.

아마도 그때까지 찍은 정감독의 작품중 '만다라' 야말로 으뜸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직장암으로 '사형선고' 를 받고 누워있는 정감독을 불러내 만든 영화였으니 그 감회야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만다라' 의 마지막 결말에 법운과 어머니의 상봉 장면을 도입, 나는 원작과 배치되는 설정을 했다.

내 나름대로의 재해석이었다.

끊임없는 갈등속에서 완벽함을 추구하는 대상이 삶과 죽음의 문제라면, 그 구도의 길이야말로 '비어있는 길' 이란 생각에서였다.

결말없는 엔딩을 통해 우리가 가야할 길에 대해 관객들 스스로가 관조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어머니와의 만남과 헤어짐은 '혈연의 끈을 용서하고 떠난다' 는 의미를 담았다.

83년 마닐라국제영화제에서 '만다라' 를 본 일본의 평론가 사토 타다오 (佐藤忠男) 는 "깊고 깊은 슬픔의 아름다움" 으로 이 작품을 정의했다.

이 영화는 그해 하와이영화제에도 출품됐지만 상을 타지는 못했다.

글= 임권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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