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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내면의 눈을 뜨는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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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몇 년 전 성서 연수 강의를 할 때였다. 연수에 참가한 이들은 적어도 반년 이상 소그룹으로 성경 공부를 마친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틀간 빡빡한 일정에도 연수생들의 자세는 시종일관 진지하고 뜨거웠다.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중하는 눈빛을 보면 나도 모르게 강의에 열을 올리게 된다.

그런데 유독 첫 시간부터 중년 남성 한 분이 자꾸만 창밖을 내다봤다. ‘내 강의가 어렵고 지루한가?’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거슬려 강의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쉬는 시간 복도에서 수강 태도가 불량한(?) 그분과 마주쳤다. 가까이서 보니 그분은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었다. 강의를 더 잘 들으려고 얼굴을 돌려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걸 모르고 잠시 동안이나마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다니 순간 미안한 마음과 함께 얼굴이 화끈거렸다.

점자로 성경을 읽고 어렵게 공부했다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뭉클했다. “신부님! 저는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고통과 갈등을 겪었지요. 원망도 많이 했고요. 그러나 저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람들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지금은 눈으로 볼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보게 됐습니다. 참 신비로운 일이죠?” ‘과연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제대로 보고 있을까’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본다는 것은 지혜와 깨달음, 인식과 초월, 구원과 열반에 이르는 근본이 된다. 따라서 본다는 것은 앎, 깨달음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했던가. 사람의 인식은 시각에 크게 의존하고 또 확실하게 봐야 사실로 받아들이고 믿는다. 이와는 반대로 ‘눈 뜬 장님’이라는 우리말 속담이 있다. 눈을 뜨고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경우를 빗댄 말이다. 시력이 성하다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요즘 도시의 밤하늘에서 별을 찾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 같은 일이다. 그 많던 별이 어딘가로 사라졌을까? 환경오염 때문이기도 하지만 갖가지 인공조명으로 밤이 밝아져 별빛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마당 평상에 누워 손가락으로 그리던 별자리를 이제는 교외로 나가야 볼 수 있게 됐다. 깜깜한 교외에서도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밤하늘을 보기 전 휴대전화 액정화면처럼 밝은 불빛을 보는 것은 물론 금물이다.

성경은 하느님만이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멀리서도 알아채시고 마음을 꿰뚫어 보는 분이라고 고백한다(시편 139편 2절). 인간의 눈은 유한하고 불확실하다. 역설적으로 내면의 눈을 뜨고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한다. 내면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이기심과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알게 된다. 사실 우리 주변에 감사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주위의 자연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일상의 모든 것이 다정하고 감사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진정한 ‘자신’이 되지 못하고 길을 헤매는 이유는 어쩌면 어느 정도로 눈이 멀었는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든 잘 보려면 마음으로 봐야 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

허영엽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