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 대통령 자료관을 짓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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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에겐 네분의 전직대통령이 있다.

4년 뒤면 전직대통령 다섯분을 모시는 흔치 않은 기록을 지니게 된다.

다행히 네분 모두 건강이 좋은 것 같다.

경제적 여유도 있어 보인다.

그런데 네분 모두 할 일이 없어 보인다.

아니 그중 몇분은 바쁘게 움직이지만 별로 중요치 않은 일에 돈과 정력을 쏟는 것 같아 안타까워 보인다.

이 분들이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끔 간곡한 부탁 하나를 드리고 싶다.

대통령기념도서관을 짓고 재직때의 공적.사적 기록물들을 챙기고 전시하고 연구하는 작업을 벌이기를 제안한다.

별로 본받을 일도 못했는데 무슨 기념관이냐는 반론도 있겠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잘했든 못했든 재임시 내린 국가 중요 정책결정은 그 자체가 역사적 가치나 의미를 지닌다.

외국지도자들과의 서신이나 개인의 일기라도 좋다.

일체의 기록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분류하고 때가 되면 공개하는 미국식 대통령기념도서관을 설립하자는 취지다.

왜 이런 제안을 하는가.

우선 한국의 정치풍토개선을 위해 바람직하다.

건강.돈.시간이 충분하면 왕년의 고수 정치인들이 가만 있을리 없다.

여기에 다수 추종자들이 모여든다.

등산하고 골프장을 찾는 것도 좋다.

그러나 퇴임대통령의 소일거리가 이 정도여서는 곤란하다.

고향을 찾고 성묘정치를 한다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국민들 눈엔, 전직이 현직을 독재자로 몰고 전임이 대북정책을 성공적으로 했는데 후임이 일을 그르쳤다는 식의 물고 물리는 꼴불견 대결로만 비칠 뿐이다.

전임과 후임이 원수간이고 전직이 현직을 손가락질하는 정치풍토에서 정치가 제대로 될리 없다.

국민교육에도 악영향을 준다.

부시 전대통령의 기념관 준공식에서 전임대통령들이 나란히 서서 환하게 웃는 사진 한장이 얼마나 흐뭇하던가.

퇴임대통령이란 정말 소중한 존재다.

우리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기록의 보고다.

잘한 일 못한 일, 이 모두가 우리 현대사의 족적이고, 이를 거울삼아 미래를 여는 경험과 교훈의 산 자료들이 될 수 있다.

실패한 정책이든 성공한 업적이든 가리지 않고 솔직하고 용기있게 재임중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다시 회고하며 쓰는 역사적 작업을 지금부터라도 시작한다면 이보다 더 후세에 남을 업적이 없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치적중 가장 잘한 일중 하나가 34년 국립문서관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s) 설립이다.

서울 동대문운동장의 16배나 되는 지하서고엔 연방정부의 모든 문서가 종합, 분류된다.

12개 지역문서관과 11개 대통령도서관을 국립문서관이 관할한다.

한국 현대사 관련 문서가 이곳에 어림잡아 2백만쪽 이상이 소장돼 있다.

지금 우리 실정은 어떤가.

유일한 대통령 사설기념관이 이화장 (梨花莊) 이다.

수십만건에 이르는 우남 (雩南) 이승만 (李承晩) 의 기록들을 보관해오다가 두해 전 연세대 한국학연구소에 기증했다.

경북 구미시에서 박정희 (朴正熙) 기념관을 추진 중이지만 진척이 별로 없다.

이후의 대통령들은 통치사료비서관까지 두고 재임중 기록물을 정리, 보관한다고 했지만 어떤 형태로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대통령의 기록물은 사유물이 아니다.

국민의 것이고 역사의 일부다.

전직 네분이 모여 이 역사기록물들을 어떻게 수집, 정리할지 함께 의논하고 추진한다면 기업과 독지가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돕는 일도 생길 수 있다.

이와 연관해 현직 대통령이 서둘러 추진해야 할 과제가 있다.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리 역사기록물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이다.

광복 50주년이 지났고 20세기가 저물고 있지만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 자료는 단 한번 체계적으로 수집.정리되지 못했다.

일제 식민자료는 일본에, 전쟁자료는 미국.중국.옛소련에 더 많이 보관돼 있다.

일본 국회도서관은 미국내 일본 자료를 구입하기 위해 14년간 2천억원을 들였다.

이런 작업을 벌일 기관이 정부기록보존소.국사편찬위원회.정신문화연구원.국회도서관이다.

최근 국가기록연구재단이 사단법인으로 발족했다.

그렇지만 하나 같이 재원이 부족하다.

기천만원 예산으로 이 큰 작업을 할래야 할 수가 없다.

방법은 한가지다.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고 유관기관이 연대해 흩어진 국가 기록물을 한자리에 모으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다.

그래야 역사가 바로 서고 나라도 바로 선다.

영원한 현직은 없다.

제2건국운동이 역사바로세우기라면 흩어진 국가기록물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서 첫 출발을 해야 한다.

권영빈 논설위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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