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엘리자베스여왕 인사동 방문에 부쳐- 시인 정진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서울의 일정이 즐겁고 편안하십니까. 우리는 조상 제사를 모시고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살아가는 일의 첫번째 순위로 삼고 있는데 그것도 만에 하나 국빈이신 여왕을 모시는 일에 소홀함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통문화의 거리라고 하는 이곳 서울 인사동을 둘러보신 감회는 어떠하셨는지요. 거리엔 청사초롱도 밝히고 우리의 풀꽃, 할미꽃이며 민들레들을 새로 심어 꽃단장을 하기까지 한 것을 보고 저윽이 안심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걱정이 없지도 않았습니다.

잘 정돈된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시려면 중앙박물관이나 특히 추사 (秋史) 의 묵향 (墨香) 으로 깊고 그윽한 멋을 자아내는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이라도 둘러보시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었는데 굳이 인사동 거리라니 처음엔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옛 일상이 살아 숨쉬는 물건들이긴 합니다만, 손때에 절은 떡살 다식판 따위의 목기류들이나 낡은 고서들이 되는 대로 귀한 고려 청자며 조선백자들 사이에 섞여 널부러져 있는, 어찌 보면 오죽잖은 이 거리가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사동 한켠 모래틈만하게 터잡고 30여년간 시를 써온 저로서는, 요즈음 새로 생긴 인사동 초입 '밀밭' 국수집의 조개를 듬뿍 넣어 끓인 칼국수 맛이 제격인데 이걸 여왕께 점심으로 대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골목 주점 주점들에서 오늘도 이어지고 있는 조선 시인묵객들의 맑고 드높은 예술적 대화를 여왕께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내심 혼자서 하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평소 성격대로 의례적이고 정치적인 면을 최대한 줄이고 대신 한국민의 문화와 역사의 향기를 찾는데 일정을 맞추셨다니 이곳 여항 (閭巷) 의 허트러진 멋이 더 친근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징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상징의 실체란 저래야 한다는 느낌을 깊게 받았습니다. 정장 투피스, 모자, 장갑으로 단장하신 예의 당신의 모습은 친근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징을 실체로 지닌 영국민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특유의 자존과 질서를 지녀온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당신을 뵙는 순간 우리의 신라적 선덕여왕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은 연민과 너그러움과 사랑과 위로의 성정과 실천이 뛰어나신 그런 분이셨다고 합니다.

언감생심 여왕에 대한 짝사랑으로 불타고 있었던 미친 지귀 (志鬼) 라는 사내의 누워 자는 가슴에 황금팔찌를 벗어 놓아 그의 사랑의 불꽃을 다스렸다는 기록이 우리의 가슴에 각인 (刻印) 되어 있는 그런 여왕이시기도 합니다.

실은 이 글을 쓰면 제격이셨을 우리의 대시인 미당 (未堂) 서정주 선생은 '선덕여왕의 말씀' 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너무들 인색치 말고 있는 사람은 병약자한테 시량 (柴糧) 도 더러 노느고 홀어미 홀아비들도 더러 찾아 위로코, 첨성대 위엔 첨성대 위엔 그중 실한 사내를 놔라 별을 바라보며 평화의 나라 도리천을 꿈꾸던 시인의 신화적인 사랑과 너그러움과 그윽한 의지가 담겨 있는 '선덕여왕의 말씀' , 그걸 당신 엘리자베스의 미소에서도 느꼈다면 과장이 되겠습니까.

정진규 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