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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삼칼럼]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부족간에 엄청난 학살극이 벌어졌던 지난 94년의 르완다내전에 관한 기억을 되살려보자. 더 악랄했던 쪽은 어느 부족이었던가.

후투족인가, 투치족인가.

어느 쪽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기억이 희미한 것은 이해관계도 없고, 관심을 끌만한 요소를 지니지도 않은 지역의 내란이었던 탓도 있지만 그 이전에 학살극 등 내전의 양상을 보도했던 서구 미디어의 관점이 뜨뜻미지근하게 비교적 가치중립적이었던 데 그 까닭이 있다.

그러면 코소보사태.유고사태에 관한 우리들의 인식은 어떨까. 아직 우리 국민을 상대로 한 조사결과는 발표된 바 없지만 추측컨대 대다수가 밀로셰비치나 유고측에 관해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이 역시 당연한 일이다.

16일로 24일째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 의 유고공습이 계속되고 있다.

이 동안 나토가 미사일과 폭탄만 유고에 투하한 것은 아니다.

나토는 유고공습과 동시에 전세계 여론을 상대로 한 미디어전쟁도 동시에 수행했다.

연일 서구의 통신과 신문.방송은 분명한 가치판단 아래 코소보 난민들의 참상을 사진과 화면을 통해 생생히 보여주었다.

반면 유고의 피해는 차량 30여대.유류저장소.다리 등등 하는 식으로 주로 인명 이외의 상황만 간략히 전해져 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유고측에 일방적으로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우리의 미디어가, 또 우리들의 인식이 과연 이래도 좋을까. 왜 우리는 르완다내전 때는 초연했으면서 유고사태 때는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 걸까. 이런 회의 (懷疑) 는 비 강대국들 사이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돼온 문제다.

'왜 우리는 서구 통신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유네스코) 는 지난 80년에 이런 문제의식을 주제로 제21차 총회를 개최한 바 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때 총회가 열린 곳이 바로 현재 나토측의 치열한 공습을 받고 있는 베오그라드였다.

당시 총회는 '매스미디어가 전쟁과 인종주의, 그리고 국가간의 증오를 위한 선전도구로 사용돼선 안된다' 는 점과 '언론이 관대하지 못하고 국수주의에 빠지며 다양한 견해를 포용하지 못할 때 전쟁 발발의 가능성이 커지므로 언론은 해당국가의 정치.경제적 이익보다는 인류 전체의 복지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고 결의한 바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국제적인 연대도 강대국의 힘 앞에는 무력했을 뿐이다.

지난 75년에는 서구 통신사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천적인 대책으로 비동맹국가들이 공동으로 통신동맹을 창설하고 유고의 탄유그통신 설비를 이용해 자기들의 목소리를 전해 보기도 했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인권을 위해, 핵의 확산방지를 위해, 정의를 위해 등등 명분만 좋다면 얼마든지 무력을 사용해도 괜찮다는 식의 힘의 논리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냉전체제가 붕괴된 이후 이런 힘의 논리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세계는 나날이 다원화하고 있고 세상 일도 하나의 잣대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게 복잡화하고 있다.

복잡계이론이 대두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 편향되고 단세포적인 인식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더구나 남의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더욱 안될 일이다.

블라디슬라프 유엔주재 유고대사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토가 공습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알바니아계 양민의 대량학살 방지라는 데 대해 '양민학살' 은 코소보해방군 소탕작전중 벌어진 불상사였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변명했다.

또 희생자 수도 1백여명이 아니라 22명이라고 주장했다.

유고 민간인 피해도 사망 4백여명, 부상 5천여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정확한지는 모르나 참상은 코소보 난민쪽에만이 아니라 유고쪽에도 빚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또 서구 내부에서도 나토의 공습이 결코 인도주의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꼬리를 물고 나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중앙일보 국제부가 AP통신.CNN 등 서방 언론의 시각에서 탈피해 전쟁의 실상을 공정하고 정확히 보도하기 위해 유고내 언론과 지식인들에게 E메일을 보내 실상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신선하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세계를 우리의 눈으로 보는 자세는 더욱 더 절실한 과제가 될 것이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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