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영업사원 洗足式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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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옛날 팔레스타인에선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먼저 발 씻을 물부터 내놓았다.

샌들을 신고 먼 길을 왔으니 흙먼지로 발이 더러울 수밖에 없다.

식탁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손님의 발을 하인이나 집주인의 부인이 정성껏 씻어주는 것이 관습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날 최후의 만찬에서 12제자들은 누가 가장 훌륭한 제자인가를 놓고 다퉜다.

예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야에 물을 담아 와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었다.

예수는 스스로 비천한 일을 맡음으로써 "누구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돼라" 는 겸손한 섬김의 정신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초기 교회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은 행동을 세족례 (洗足禮) , 이를 행한 날을 세족 목요일로 정하고 그를 실천했다.

처음엔 로마 교황청과 일부 교구에서만 행했으나, 694년 스페인 톨레도에서 열린 17차 교회회의에서 인증받은 뒤 널리 퍼졌다.유럽에선 부활절에 앞서 세족 목요일에 왕과 왕족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 그들의 발을 씻어주고 선물을 나눠줬다.

영국에서 세족례는 13세기말 에드워드 1세가 빈민들의 발을 씻어줌으로써 시작됐다.

1662년 찰스 2세는 네종류의 은화가 들어 있는 지갑을 선물로 주는 세족 목요일 구제금제도를 만들었다.

영국교회는 1754년 세족례를 폐지했으나 1932년 조지 5세때 부활됐다.

그러나 왕이 직접 서민들의 발을 씻는 대신 향수를 뿌린 수건을 발에 대는 것으로 간소화했다.

오늘날 세족례는 주로 구교에서 행한다.

개신교에선 일부 행하는 교파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행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종교행사가 아닌 경우에 세족식을 행하는 예가 종종 눈에 띈다.

의사가 환자에게, 교사가 학생에게, 그리고 사회봉사단체들이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세족식을 행한다.

지난해 12월 서울 용산역에선 노숙자들을 위로하는 대규모 세족식이 열려 2천명이 참가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회사 차원의 세족식까지 등장했다.

지난 주말 한 전자회사에선 임원들이 일선 영업사원 1백명의 발을 씻어주는 이색행사를 벌여 화제가 됐다.

'영업사원의 발은 회사의 가장 소중한 자산' 임을 경영진이 몸으로 보여주자는 것이라고 회사측은 설명한다.

조금 어색한 느낌도 있긴 하지만 상하 (上下)가 이같은 겸손함으로 서로를 대한다면 노사간 갈등은 발 붙일 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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