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에 서서] 증오에 떨던 세월털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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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 증오에 떨던 세월 털고 詩心으로 하나될 날을

- 北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당신의 얼굴을 나는 전혀 모릅니다.

당신의 이름도, 당신의 목소리도, 당신의 성별도, 당신의 나이와 체중도 전혀 모르는 나에게, 그러나 당신이 나와 함께 이 세상에 있다는 유적 (類的) 존재감이 확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우면산 마른 잎새에 싸락싸락 눈 쌓이는 소리를 듣고 있을 즈음, 능라도가 마주보이는 기슭의 눈 맞은 갈매나무 아래에 누군가 서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나뭇잎들을 흔들어 놓고 북상하는 바람 속에서 어느날 내가 당신의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생각하고 있었듯이, 내 몸부림치는 옷자락을 생각하는 당신이 이 세상에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뭐랄까, 일상의 빠른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면서도 먼 피안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서도 한눈파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으며, 시인들이란 대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니까요.

21세기 새 천년에 대한 어떠한 전망도 갖고 있지 못하지만 나는 소위 제국주의와 식민지와 전쟁과 정치적 독재의 완강한 이빨자국으로 점철된 한 세기의 페이지를 넘겨야 하는 마당에 다음 장에까지 이어지는 분단이라는 붉은 밑줄에 대해 좀 진절머리나는 느낌이 듭니다.

당신과 내가 발딛고 있는 이 지표 (地表) 위의 유일한 분단국이라는 것에 대한 수치심도 지루해졌지만, 우리의 삶 모두를 으깨어 놓은 이빨의 고착된 힘 아래 우리는 그 통증에 대해 무감각해진 채 서로의 '데켄' (저쪽) 으로서의, 적으로서의 50년을 살았네요.

1952년, 전쟁이 한창 진행중일 때 남녘땅 바닷가에서 태어난 나나 그 무렵 얼어붙은 국경의 강변에서 태어난 당신이나 이 분단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분단은 우리의 전 생애가 돼 버렸습니다.

그리고 민족재통일이라는 지난한 역사과목 숙제를 우리 세대에 떠넘기면서 지금, 한많았던 한 세기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일이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며 마음이 우러나와야 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북한' 이라는 낱말 자체와 '북 (北)' 과 관련된 모든 이미지가 나에게는 겁부터 덜컥 나게 하고 뭔가 꺼림직하고 무섭고 춥고 으스스하고 딴딴하고 뻣뻣한 것, 혹은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부정적인 반응 체계와 조건반사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이 공포감은 그동안 우리의 눈과 귀에 못박은 '증오의 이데올로기' 의 가면 뒤에 숨어 있던 진짜 표정이죠. 그 이데올로기의 맞은편 패를 그쪽에서 쥐고 있던 황장엽씨의 서울 망명은 소련 붕괴와 더불어 우리에게도 90년대 최대의 충격이었습니다만, 그의 최근 회고록을 보면서 나는 북한사람들도 남한사람들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얼른 이해가 가면서도 좀 놀랐습니다.

어느 쪽에서든 우리는 악령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나는 남한사회에 있어 정치권력에 대한 지역적 독점에서 야기된 동서간 편견의 내면화에 시달리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좋다, 하나에서 둘이 나오지만 둘에서 하나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둘에서 여럿 (多) 을 거쳐 하나로 돌아갈 수는 있다, 뭐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꽉 뭉쳐져 있는 편견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그 구심점에 놓여 있는 작용하는 힘에다가 각각의 가치를 부여해 줘버리자, 대신 그 차이들이 풍부한 부가가치들을 만들어 내면 되지 않겠느냐, 뭐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또 무슨무슨 축하 퍼레이드에 동원돼 광장 언저리에 나가있을 지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이 안고 있는 아이의 배가 쪼르륵 소리를 내고 있으리라는 사실이 너무너무 가슴 아픕니다.

아마 당신은 어금니를 씹으며 멀리 을밀대 축대 밑으로 한 채의 옛 역사의 그림자를 흔들며 내려가는 물을 쓸쓸하게 바라보고 있겠지요. 비가 그치고 개나리며 진달래가 일제히 눈부신 색동을 밝혀 놓았군요. 한 1주일 뒤면 대동강 기슭에 도착할 이 화사한 화신 (花信) 을 부치지 못할 내 편지 대신 읽어주십시오. 제발 살아서 우리, 만납시다.

황지우 시인.예술종합학교 교수

[세기말에 서서' 시리즈는 이번회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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