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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보좌’ 권노갑, DJ와 함께한 정치인생 48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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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신’ ‘DJ의 오른팔’ ‘DJ의 그림자’-.

민주당 권노갑(80·얼굴) 전 고문의 이름 앞엔 늘 DJ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DJ의 고향 후배이자 48년간 그림자 보좌를 해온 그의 인생은 그 자체가 고스란히 DJ의 삶의 궤적일 수밖에 없었다. 영어 동시통역사를 꿈꾸며 늦깎이 유학(미 하와이대 동서문제연구센터) 중 급거 귀국한 그는 지난달 DJ 국장 때 사실상의 맏상주 역할을 했다. 주군을 떠나 보낸 허전함 때문일까. 영결식이 끝난 후 그는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그를 만나 DJ와 함께한 정치인생 48년을 들어봤다.

그는 먼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끝이 오게 마련이지만 너무도 허망하다”고 DJ를 잃은 심경을 표현했다. 그러면서 “다시 태어나도 김 전 대통령을 모시고 싶다. 그분한테 누를 끼치지 않도록 여생을 국민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DJ 유훈정치 논란과 관련해선 “(DJ는) 누가 밀어주거나 도와준다고 큰 정치인이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늘 강조했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김 전 대통령의 임종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인생이란 게 이렇게 허무하구나…(이 대목에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민족을 위해 큰 업적을 남기고 세계적 지도자로 평가받은 분도 인간인 이상 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언제 시작된 겁니까.

“66년 전인 1943년 목포상고 1학년 때입니다. 당시 김대중 선배는 공부 잘하고 인물도 좋아 한국인 후배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어요. 비서로 뛰어든 것은 5대 민의원 선거(61년) 때예요. 자꾸 선거에 떨어지는 게 안타까워서 목포여고 영어교사를 그만두고 보좌를 시작했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

“6대 총선에서 목포에서 당선됐을 땝니다. 계속 선거에 떨어지다 국회의원에 당선되니 감격할 수밖에요. 그분이 ‘고기는 물을 만나야 하는데 물을 못 만나고 있다’고 한탄하곤 했는데 이제 정치를 할 수 있게 됐구나 하는 생각에 기뻤지요. 또 정권교체로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의 기억도 생생합니다.”

-김 전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입니까.

“지난 2월 출국 인사를 갔을 때예요. ‘미국 가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꼭 목적을 달성하길 바란다’며 격려의 뜻으로 당신이 오랫동안 써오던 몽블랑 만년필을 선물로 줬어요.”

-민주당 박지원 의원이 “DJ가 ‘정세균 대표를 중심으로 단결하라’고 했다”고 공개하면서 DJ 유훈정치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이희호 여사나 (차남) 김홍업 전 의원한테서 김 전 대통령이 그런 유언을 남겼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또 박 의원이 내게 그런 얘기를 한 적도 없고요. 그러나 박 의원이 언론에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사실일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다만 김 전 대통령은 평소 ‘누가 도와주거나 밀어준다고 해서 큰 인물이 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들한테도 늘 ‘내 도움으로 무엇이 되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노력해서 국민으로부터 인정받는 인물이 되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럼 김 전 대통령이 남긴 유지(遺志)는 뭐라고 생각합니까.

“ 그분 사상의 핵심은 이희호 여사가 밝힌대로 용서와 화해입니다.”

-민주당의 진로와 노선, 야권 통합 방식 등을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내가 민주당에 대해 왈가왈부할 상황은 아닙니다. 다만 김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정책을 놓고 싸우고 정책 개발로 경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63년 한·일 회담 당시 야당 의원들은 반대의 표시로 의원직 사퇴를 주장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의원직을 지켰습니다. 굴욕적인 회담엔 반대하지만 국교 정상화는 필요하다며 국회에 들어가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월남 파병 때도 야당엔 반대가 많았지만 그분은 국익을 위해 파병은 필요하다며 박순천 여사 등과 함께 직접 베트남에 가서 장병들을 위문한 일도 있습니다. 민주당의 장외투쟁엔 타당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럴수록 ‘원내·외 병행 투쟁을 해야 된다’는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이면서 집권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본 연수를 떠났고 옥살이도 했습니다. 국회의원과 당 최고위원 경선 출마도 좌절됐습니다. 김 전 대통령에게 섭섭한 감정이 들지는 않던가요.

“난 평생을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을 위해 살아온 사람입니다. 섭섭함이나 마음의 앙금 같은 건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권 전 고문은 16대 총선(2000년)에서의 불출마 선언과 구속 됐던 일을 상세히 소개했다.

“서울 동대문 갑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김희선 의원을 공천해야 하니 내게 전국구로 가라고 해요. 그러나 (외부 영입 세력을 우선순위로 배정하면서) 결국 전국구도 못하게 됐지요. 또 (DJ가) 현역 의원 ‘물갈이’에 앞장서라고 해서 ‘저승사자’란 소릴 들어가며 현역 의원 30여 명의 불출마 선언을 이끌어냈어요. 30여 명의 지역구에서 버스 한 대씩만 동원해 농성을 벌였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내가 나서서 큰 잡음 없이 마무리를 했지요. 권력형 비리자로 낙인 찍혀 옥살이까지 할 때는 너무 억울해서 죽고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김수환 추기경이 저의 결백을 믿어줬고 김 전 대통령도 무죄를 믿어줘 견딜 수가 있었어요.”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설 생각이 없느냐”는 물음을 던지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DJ가) 지어준 내 별명이 ‘권비단’이에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노갑이 저 사람은 마음이 비단결이야. 부드럽고, 누가 욕을 해도 참고, 무슨 일이든 내 뜻대로 그대로 하고 맘이 참 좋아요. 비단이야, 권비단’이란 칭찬을 여러 번 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여든의 노정객에게 남은 마지막 소망은 뭘까. 권 전 고문은 “이 여사를 잘 보살피고 DJ 기념사업에 전념을 다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앞으로 후진 양성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며 “김 전 대통령을 위해 살아왔던 내 삶의 남은 부분은 좋은 인물을 등용·발굴해 훌륭한 정치인으로 크도록 돕는 데 바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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