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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Knowledge <79> 왕실 인장의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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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고종이 비밀리에 사용했던 ‘황제어새(皇帝御璽)’를 보물(제1618호)로 지정했다. 한 장의 문서 원본과 몇 장의 사진 속 외교친서에만 흔적을 남겼던 미스터리 속의 어새가 실체를 드러낸 건 올 3월. 국립고궁박물관이 재미동포에게서 입수, 언론에 공개해 화제가 됐다. 제국의 황혼기에 외교의 손발이 묶인 황제가 비장(秘藏)했던 국새(國璽)다. 대중적 관심은 높았다. 그런데 잠깐. ‘어새는 뭐고 국새는 뭐지? ‘옥새(玉璽)’라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고종 ‘황제어새’의 발굴과 보물 지정을 계기로,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왕실 인장(印章)문화를 정리해 본다.

배노필 기자

외교용·국내용·예물용, 종류도 갖가지

대한제국 고종의 ‘황제어새’(보물 제1618호)의 인면(印面·인장이 찍히는 바닥면).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왕실의 인장은 기능에 따라 ▶공무용 인장 ▶의례용 인장으로 나뉜다.

의례용 인장은 왕실 인물에게 책봉·시호를 내리거나 존호를 올릴 때 쓴다. 국왕 재위 중에도 경축일을 기해 자신의 인장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문서에 도장을 찍는 용도라기보다 도장 자체가 일종의 예물이 되는 것이다. 국왕뿐 아니라 왕후·왕세자·왕세자빈 등을 위해서도 제작됐다. 이 의례용 인장은 당사자 사후 종묘에 안치됐다.

공무용 인장은 외교용과 국내용으로 구분된다. 흔히 왕이 쓰는 인장을 ‘국새’ ‘옥새’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국새는 사대관계에 있는 중국과의 외교문서에만 쓰였다. 교린관계에 있는 일본에 대해선 별도의 인장을 썼다. 또 어명을 내리거나 관직을 제수하고 하사품을 줄 때 쓰는 실무용 인장도 용도에 따라 달리 있었다. 이를 ‘국새’에 포함시킬지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국새의 구분과 용도가 헷갈리는 것은 우리가 중화주의적 왕조국가에서 근대 국민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혼란이기도 하다.

명나라서 3번, 청나라서 3번 받아

오늘날의 기준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국새는 단 하나여야 한다. 그렇게 보면 대한제국 이전까지 우리의 국새는 ‘중국산’이었다. 사대·책봉 외교 때문에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국새’를 받았던 것이다.

고려 말 공민왕(재위 1351~74)은 신흥 명나라에서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을 받았다. 책봉을 받았다는 의미다. 중국은 황제의 상징인 ‘새(璽)’ 대신 ‘인(印)’으로 깎아 내렸다. 조선 건국 이듬해 이성계는 이 ‘고려국왕지인’을 명나라에 반납하고 새로운 국새를 청했다. 하지만 명나라는 질질 끈다. 이때 조선은 임시로 ‘조선왕보(朝鮮王寶)’라는 국새를 만들어 써야 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조선왕보’가 대한제국 이전의 조선이 독자적으로 제작한 유일한 국새인 셈이다.

어새는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를 하고 있으며, 전체 높이 4.8㎝·가로 5.3㎝·세로 5.3㎝·무게 794g의 크기로 금·은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조선 건국 10년이 지나 태종대에 가서야 명나라는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준다. ‘인(印)’에서 보듯 역시 조선을 제후국으로 깎아 내린 것이다. ‘조선국왕지인’은 명나라 때 세 번, 이어 청나라 때 세 번 인수한다. 청나라가 준 ‘조선국왕지인’은 처음에는 아예 만주어로, 그 다음에는 한자와 만주어를 병기한 도장이라 눈길을 끈다.

사대관계 청산한 고종의 ‘황제어새’

중세 동아시아의 ‘글로벌 스탠더드’였던 사대·책봉·조공 외교를 오늘날의 시각에서 ‘종주국-속국 관계’로 봐선 곤란하다. 한국사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 전체를 오해하게 된다. 책봉과 조공은 당시 중국 중심의 외교질서에서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는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말에 이르러 통상관계가 다변화된다. 1880년대에 고종은 외교문서에 쓰일 ▶대조선국보(大朝鮮國寶)▶대조선국대군주보(大朝鮮國大君主寶) 등을 제작한다. 중국이 깎아 내린 ‘인(印)’에서 한 단계 격을 올려 ‘보(寶)’를 쓴 것이다.

대한제국 수립 뒤 고종은 명실상부한 ‘국새’를 제작한다. ▶대한국새 ▶황제지새 등 ‘새(璽)’자가 들어간 황제의 인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국새’ ‘옥새’에 공통되는 ‘새’는 ‘보(寶)’보다 격이 높은 것으로 친다.

사대질서에 있어 ‘새’는 중국의 황제만이 쓸 수 있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전국새(傳國璽)’를 제작해 천자(天子)의 상징으로 삼은 데 따른 것이다. 명칭뿐이 아니다. 인장 손잡이인 ‘뉴’의 장식도 위계를 뒀다. 황제는 용을 쓰고, 제후(임금)는 거북이로 낮췄다. 대한제국의 인장에 ‘새’라는 글자를 쓴 것은 청나라와의 사대관계가 끝났다는 선언이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옥새’는 말 그대로 따지면 ‘옥(玉)’으로 만든 국새다. 인장은 금·은·옥 등으로 만들었다. 중국에선 ‘옥’이 ‘금(金)’보다 격이 높다. 그래서 황제의 인장을 ‘옥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은 반대다. ‘금’은 임금의 인장에, ‘옥’은 왕세자의 인장에 해당한다.

1776년 영조 83세에 내린 은인(銀印)의 인영. ‘효손(孝孫)’은 손자인 정조로 추정된다(左).<기사 참조>‘대조선국 주상지보’의 인영. 1876년에 제작돼 일본 관련 국서에 썼다(中).1876년 고종 때 만든 『보인소의궤』에 기록된 ‘조선국왕지인’의 인영. 오른쪽에는 한자로, 왼쪽엔 만주어를 병기해 새겼다. 청나라가 1776년 조선에 줬다는 기록이 있다(右).

잃어버린 국새를 찾아서

‘고려국왕지인’ ‘조선국왕지인’의 행방은 묘연하다. 사대관계에 의해 ‘하사’받은 ‘국새’라 현대적 시각에선 큰 가치를 둘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면 사대관계를 종식하고자 고종 연간에 만들어진 국새들은 어디로 갔을까? 당시 기록상 10여 종에 달하는 국새 중 대다수의 행방을 알 수 없다. 이번의 ‘황제어새’는 황실의 공식 기록에 없던 비밀 국새가 발굴된 것이다.

국권 침탈 직전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새를 약탈해 간 기록이 있다. 일본 궁내성에서 보관하다 패망 뒤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일부 인수해 1946년 우리에게 넘겨줬다. 당시 우리는 특별전까지 열어 국새의 환국을 반겼으나, 한국전쟁을 겪으며 그 전부를 유실한다. 식민통치와 전쟁 탓만도 아니다. 1970~80년대 전반 사이 국가가 보관 중이던 ▶조선왕보 ▶조선국왕지인 등 국새의 상당수가 관리 소홀(?)로 사라졌다. 지금은 ▶제고지보(制誥之寶·고급 관리 임명용) ▶대원수보(大元帥寶·군 통수용) ▶칙명지보(勅命之寶·통신문서용)만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하지만 황제로서 고종의 군 통수권을 상징하는 ‘대원수보’를 예외로 하자면 나머지 인장이 정식 ‘국새’에 해당되는지도 논란거리다.

보물로 지정된 ‘황제어새’가 중요한 건 엄밀한 의미에서 현존 유일의 ‘국새’이기 때문이다.

정조가 서거한 해(1800년)에 만들어진 금보(金寶)의 인면(왼쪽). 대한제국 출범(1897년)과함께 명성황후의 옥보(玉寶)도 제작됐다. ‘명성황후지보’라고 새겼다.

정조의 효심을 기린 ‘어보’

국새와 구분해 ‘어보(御寶)’라는 것도 있다. 이 중 ‘의례용 어보’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320점 등 총 328개가 남아 있다. 왕·왕비, 왕세자·왕세자빈 등 왕실 인사들의 ‘기념품’으로 만든 것이다. 생전에는 옥으로 만든 ‘옥보’를, 사후에는 금으로 만든 ‘금보’를 제작해 업적을 기리는 게 보통이다. 한 사람에게도 여러 개의 어보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수량이 많다.

왕실 인사에게 어보를 바칠 땐 궁중에서 성대한 예식이 펼쳐졌다. 문무백관이 배석한 가운데 왕권을 과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왕권 과시’에는 역설이 있다. 실제로 왕권이 강하다면 굳이 별도의 의례를 치러 과시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왕권이 약화되던 19세기 이후 제작된 어보가 전체 328개 중 절반을 넘는다. 철종은 재위 15년간 30개를 만들었고, 고종은 45년 재위 중 105개를 제작했다.

어보 중 흥미로운 건 영조 52년(1776)에 제작된 ‘효손은인(孝孫銀印)’이다.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에 감복해 영조가 하사한 어보로 여겨진다. 보통 인장에 쓰이는 전서체와 달리 영조의 친필 해서체로 제작됐다. 당시 83세의 영조 밑에서 국정을 돌보기 시작한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승정원 일기 기사를 삭제해 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에 영조가 ‘효손’이라며 정조에게 선물을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세자 책봉 등에 내리는 어보는 인장에 새긴 문장이 같은 경우가 많다. 그냥 ‘왕세자인(王世子印)’이라고만 돼 있는 식이다. 하지만 같은 글자라도 조금씩 획이 다르게 새겨져 있다. 300개가 넘는 어보 중 같은 게 하나도 없다는 점이 흥미롭다.

옥새 제작의 비전(秘傳), 영새부

옥새전각장인 세불 민홍규에 따르면 조선왕조 내내 극비리에 구전된 옥새 제작의 ‘비전(秘傳)’이 있다고 한다. 세불은 지난해 대한민국 제3대 국새 제작을 총괄 지휘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 ‘비전’을 ‘영새부’라고 말한다. 광해군 2년(1610)의 전각장 이엇금으로부터 1인 전승돼 자신에게까지 18대 계보를 잇는다고 한다. 영새부는 국새 제작의 공예적 비법과 철학을 10단계에 걸쳐 노래로 엮은 비전이라는 것. 조선시대엔 국새 위조를 극형으로 다스려 제작 비법이 새어 나가지 않게 엄격히 통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새부의 존재가 사료에 드러나지 않지만, 국새 제작의 세밀한 사항에 대해서도 기록으로 전하는 바가 없다.

국새와 어보의 제작은 일종의 종합예술이다. 철종 14년(1863)에 옥보(玉寶) 2개를 만드는 데만 22개 분야 42명의 장인이 동원됐을 정도다. 인장 본체의 주물·전각과 손잡이 제작뿐 아니라 이중으로 된 함과 보자기, 자물쇠, 받침대 등에서 온갖 장식예술이 꽃을 피워야 하기 때문이다.

※정계옥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장과 성인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이 도움말을 줬으며 『옥새』(민홍규 지음, 인디북, 2005)와 ‘조선시대 어보 연구’(임현우, 홍익대 석사논문, 2007)를 참조했습니다.


뉴스 클립에 나온 내용은 조인스닷컴(www.joins.com)과 위키(wiki) 기반의 온라인 백과사전 ‘오픈토리’(www.opentory.com)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궁금한 점 있으세요? e-메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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