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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건전한 국제 외채질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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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세계자본주의에 새로운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

외채누적과 투기자본이라는 쌍둥이 유령이다.

이 유령이 신자유주의의 바람을 타고 출몰하는 지역마다 현지 경제는 초토화되고 시민사회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려 대량실업사회로 만들어 버린다.

이 유령은 약체경제만이 아니라 결국 세계경제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이에 대응해 시민사회의 세계적 연대로 시장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세계자본주의의 건강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이기도 하다.

그러한 운동 가운데 외채문제에 대한 '주빌리2000' , 그리고 투기자본에 대한 금융시장과 금융기구의 민주적 컨트롤을 위한 국제운동 (ATTAC) 같은 것이 특히 주목을 끌고 있다.

동남아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주빌리2000 운동은 유대인들이 50년마다 빚을 탕감해주는 전통에 의거, 2000년이라는 대전환기에 최빈국의 외채를 탕감해주자는 운동이다.

이 운동에는 로마교황.앨 고어 미 부통령.투투 대주교, 그리고 권투선수 출신의 알리 등도 참여해 상당한 기세를 올리고 있다.

최근 빌 클린턴 미 대통령도 최빈국 외채탕감을 주장하고 IMF보유 금을 매각해 외채문제 해결에 쓰자고 강조하기에 이르렀고, 일본도 공공개발원조 (ODA) 자금 일부를 포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6월의 서방선진7개국 (G7) 회의에서 최빈국 외채중 공적외채부문의 탕감이라는 극적 조치가 취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만만찮은 반론도 있다.

외채는 상환하는 것이 원칙이 돼야지 탕감해주면 채무자의 모럴 해저드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돈 가진 자가 돈 빌려주는 것을 꺼리거나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 가난한 나라가 더욱 어렵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ATTAC도 최근 자본자유화의 피해확산에 대응해 각국이 토빈세 (稅) 혹은 예치제 도입 경향이 일반화되자 부쩍 활기를 띠고 있다.

한국 같이 IMF요구에 일방적으로 순응하는 나라조차 4월부터의 자본자유화에 대한 대비조처로 일종의 예치제도입이 불가피할 것 같다.

그러나 토빈세는 세계 각국이 일제히 실시하지 않으면 성과가 나기 어렵고 오히려 힘없는 국가만 덮어씌우기를 당할 우려가 크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토빈세 라운드' 가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경제학계나 시민단체는 단순히 '주빌리2000' 이나 'ATTAC' 에 추종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논리를 갖고 창조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국채보상운동과 그것을 이은 신국채보상운동에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국채보상운동은 외채를 탕감해 달라는 운동이 아니라 그것을 갚겠다는 한국 최초의 전국적 시민운동이다.

물론 금모으기나 술.담배끊기 운동 같은 비경제적 논리는 한계가 있으나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빚을 갚겠다는 결의는 채무자 모럴의 극치다.

신국채보상운동에서는 단순히 금모으기 수준을 넘어 그것을 경제적 혁신논리로 승화시키려 하고 있다.

이러한 신국채보상운동의 논리에서 보면 채권자의 모럴 해저드가 문제다.

구한말 국채보상운동도 결국 일본의 악랄한 외채음모에 의해 실패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는 채권자의 특수한 모럴 해저드에 희생된 운동이다.

구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교훈은 채무자의 모럴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채권자의 모럴 해저드가 극복돼야 한다는 것이다.

신국채보상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외채를 갚기 위해서는 금모으기 수준을 넘어 건전한 생산혁신운동 - 경쟁력증가 - 수출증대로까지 가야 하지만,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악성외채나 투기자본이 규제돼야 하고, 외채에 의해 생산된 제품에 대해 수출시장의 문을 열어주어, 건전하게 외채를 갚을 수 있는 국제적 사이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단기투기자본이 밀물처럼 몰려와 경기를 붕 띄워놓고 썰물처럼 빠져나가 경기를 꽝 떨어뜨려 놓으면, 결국 외환위기 - 외채위기로 귀결되게 마련이고, 그러한 경우 외채를 갚을 도리가 없게 된다.

또 IMF식으로 돈은 꿔주되 오히려 수출입조건은 불리하게 만들어 버리는 '언 발에 오줌누기' 식으로는 외채문제 해결은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국채보상운동의 논리의 현대화.세계화를 통해 SIDO (Sound International Debt Order) 라는 개념에 이르게 된다.

건전하게 외채를 빌릴 수 있고, 그것을 건전하게 써 생산혁신을 이룩하고 그 결과를 수출하고, 결국 건전하게 외채를 갚을 수 있는 '건전한 외채질서' 를 수립하는 것이다.

채무국의 신인도 조사도 중요하지만 채권국의 채권 불건전도 조사도 해야 하고, 외자유치도 중요하지만 투기자본의 교란을 막아야 하고 그래서 생기는 불건전채권 페널티와 토빈세를 SIDO 건설에 연결시키는 스와프정책이 세계경제를 위협하는 유령을 잡는 길이면서 한국경제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길이 아닐까.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인 대구에서 신국채보상운동의 일환으로 '대구 라운드' 를 추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영호 경북대교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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