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비평] 영화 '욕망의 모호한 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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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루이 브뉴엘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 욕망은 모호하다. 언제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왕복운동 중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멀리 있다면 욕망은 그 이상을 당겨 놓는다. 단, 동시에 현실을 미루면서 그렇게 한다.

환상으로부터도 떨어져 있되 어떤 상상보다도 자유롭게 생을 부추긴다. 부재의 현실을 응시토록 하여 현실을 부정하게 하는 충동의 동력, 의지의 숨은 신 (神) .결과는 허망할지라도 이와 상관없이 욕망은 여전히 저기 있는, 독한 리얼리즘이다.

콘치타는 말한다. "오늘은 안돼, 내일도 안돼, 모레 하자. " 이것이 욕망의 존재 방식이다. 그러니 콘치타는 마법사도, 천박한 요부도 아니다. 생래적인 현자다.

순순히 복종하지 않으면서 마티유의 마음을, 그리고 관객의 욕망의 시선을 더 깊은 곳으로 이끌 줄 아는, 그리하여 그 어둔 심연에서 관객이 스스로 자기 욕망의 표정을 보게 만드는 세헤라자데다.

그리고 변장한 실존주의자다. 콘치타는 마티유에게 침을 뱉으며 말한다. "오랫동안 빌었어. 너의 파멸, 너의 죽음을!" 전날 밤 그에게 사랑을 고하던 바로 그 입술로, 2인1역의 두 얼굴, 이보다 확실한 주체가 있는가?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차라리 마티유다.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도 사랑이라면 늘 눈멀 수 밖에 없는, 하릴없는 인간의 그토록 얼간이 같은 욕망. 그걸 늙은 부르주아의 위선이라 불러선 안된다.

그는 솔직했다. 그 솔직함이 비록 욕망의 불명료성과 만나 마티유의 행동을 번번이 우행 (愚行) 으로 만들어 버리지만, 어찌하랴. 결혼식 대신 장례식이 준비되어 있을지라도 한치를 못 내다보고 욕망 앞에 눈이 머는 것. 유감스럽지만 이것이 인생이다.

소실점 너머로 뻗어난 길 위에서 욕망은 항상 도망 중이고, 우린 항용 검거에 실패하는 추적자다.

그러나 애통해 하거나 노할 필요없다. 그것이 유예된 낙원, 요컨대 지옥을 살아내는 하나의 수단이 아닐는지. 마티유의 묘비에, 혹은 욕망의 황금 도금이 휘발되어 버린 비루한 삶들의 모퉁이에다 나라면 브뉴엘 만큼 경쾌한 포즈로, 다소 만용을 부려 이렇게 쓰겠다.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살고 모든 것은 순간이다. " (푸슈킨).

김정룡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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