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회생책 시급한 검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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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통령 행사 때마다 배경 사진으로 신문.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 휘호 액자가 요즘 들어 특히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법무부나 검찰이 처리한 일들이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 없이 모두 자충수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대선 공약사항인 인권법 제정과 국민인권위원회 설치의 논의과정에서 나타난 법무부 태도를 보자. 정부의 인권 주무부처인 법무부는 시종일관 인권위의 무력화에 온 힘을 쏟았다.

인권위의 인사.예산권은 물론 하다못해 정관 개정이나 보고서 제출.과태료 부과 권한까지 모두 법무부장관이 갖도록 법안을 만든 것이 그 증거다.

인권보호는 뒷전이고 오로지 산하기관이나 하나 더 늘리자는 뜻밖에 없는 것 같았다.

시민단체와 언론 등 각계의 반대로 상당 부분 고쳐졌지만 결국 인권위 설치를 달가워하지 않는 그들의 속셈만 드러내 보인 셈이었다.

이처럼 눈총을 받고 태어난 인권위가 법적 강제력도 갖지 못한 민간기구로서 과연 얼마만큼 국가 공권력의 횡포를 바로잡고 힘없는 국민들의 인권을 얼마나 보호할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대검 중앙수사부 대신 '공직자 비리수사처' 를 설치키로 한 것도 마찬가지다.

공직자 비리척결 의지를 강조하고 검찰권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취지라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81년 한국의 FBI를 자처하며 태어나 큰 사건 수사를 도맡은 중앙수사부가 축소.은폐.편파수사 비난과 함께 검찰 신뢰를 떨어뜨려온 것이 결코 기구 조직상의 결함 때문은 아니지 않은가.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을 법무부나 검찰 간부들이 본질을 외면한 채 기구 신설을 꾀하는 것은 특검제 도입 여론이나 '권력시녀론' 의 눈총을 피하기 위한 눈가림이요, 국민 기만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또 나라의 근간인 공직자들을 범법자 울타리에 넣어두고 '공직자 비리수사처' 라는 살벌한 이름의 기구를 만들어 공개적으로 감시를 선언하는 것이 타당한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백서를 발간하며 성폭행 피해자의 실명과 주소를 밝혀 말썽이 된 검찰의 '자녀안심하고 학교보내기운동' 도 문제다.

이 운동은 김태정 (金泰政) 검찰총장이 서울동부지청장 시절에 창안한 것으로 그가 검찰총수가 된 후 지금은 전국 지검.지청 단위로 실적에 따라 순위를 매겨가며 평가.표창하고 있다.

2만여회의 강연. 결연.상담과 36만여회의 점검활동 등으로 지난해 청소년 범죄가 처음으로 감소했다는 것이 검찰의 분석이긴 하지만 이같은 캠페인은 검찰 본연의 임무가 아니다.

목적이 좋으니까 누가 맡아도 괜찮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우리나라 검사 1인당 한달 처리사건은 2백41건으로 일본의 8배가 넘는다.

그렇지만 검찰은 검사의 격무나 증원 주장에 앞서 검사가 학교 순회 강연회 등에 매달리는 가외업무부터 줄여줘야 한다.

역시 검찰간부가 위원장인 청소년보호위원회 같은 전문기구에 넘겨주고 검찰은 그들을 도와주라는 것이다.

그랬다면 법률가인 검사가 성폭력 피해자의 신분을 실명으로 밝혀 검찰 전체가 망신당하는 '실수' 는 안했을 것이 아닌가.

자신의 업무도 검찰이 눈을 치떠야 겨우 움직이는 행정풍토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행정분야 업무까지 온통 검찰이 떠맡을 수는 없는 일이다.

심재륜 (沈在淪) 전 대구고검장의 변호사 개업 신고가 변호사 단체에서 보류된 것도 석연치 않다.

같은 사건의 수사과정에서 전별금.떡값 등이 드러나 퇴직한 판.검사들은 아무 제약없이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런데 왜 금품수수 비리가 아닌 이른바 항명파동으로 면직된 沈전고검장의 변호사 개업 신고만 거부됐을까. '파면.해임' 이 변호사 결격사유로 돼 있는 법 규정을 '면직' 까지 해당된다고 확대해석하는 것이 법률가로서 옳은 일인가.

징계 당시 법무부.검찰 간부들은 그의 변호사 개업에는 문제가 없다고 몇차례나 확인했었다.

검란 (檢亂)에다 2월의 정기인사가 검찰총장 임기 뒤로 연기되는 바람에 검찰간부들은 스스로를 '8월까지 시한부 생명' 이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한다.

부하들에게 시한부 지휘관의 영 (令) 이 설리 없고 지휘관 자신도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어 일손을 놓고 있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검찰의 뇌사상태' 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명맥만 붙어 있을 뿐 중추신경이 살아 움직이지 못하니 죽은 조직 (?) 이라는 의미다.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검찰이 권위와 생기를 되찾는 묘책이 하루 빨리 나와야 할 것 같다.

권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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