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탈춤보며 한국정취 흠뻑- 안동 하회마을 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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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여왕이 '동쪽' 으로 가는 까닭은 뭘까? 해동 (海東) 의 가장 편안한 고을 안동 (安東). 고을의 터를 닦은지 2천년. 안동은 다음달 21일이면 고을 역사상 가장 귀한 손님이 될 영국 엘리자베스여왕을 맞게 된다.

경주가 불향 (佛鄕) 이라면 안동은 유향 (儒鄕) .여왕은 멀고먼 여정끝에 안동의 하회마을에 들러 다리쉼을 하게 된다. 그날은 마침 여왕의 일흔세번째 생일. 마을 어귀에 서있는 장승의 모습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여왕은 나즈막한 초가들이 빼곡히 들어찬 마을길을 지나 4백여년을 버텨온 충효당에 다다른다.

이 집은 임진왜란때 영의정을 지냈던 류성룡의 고택. 꽃버선을 신지 않은 여왕이지만 툇돌을 사뿐히 밟고 대청에 오른후 14대손 류영하 (73) , 13대 종부 박필술 (83) 할머니의 따뜻한 영접을 받고는 널찍한 대청마루에 앉는다.

순간, 여왕의 입가에선 "오, 원더풀!" 하는 탄성이 나온다. 대청마루 뒤로 펼쳐진 하회마을의 전경은 봄볕을 받아 더욱 평화롭고, 마을 뒷산 화산과 그 앞을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은 한없이 유유하기만 하다. 풍수를 모르는 벽안의 눈에도 '베리 굿 플레이스. ' 숨을 고르고 눈을 돌려 안마당을 보니 장독대에는 고추장.된장.김치독들이 나란히 서있다. 마당 한가운데 있는 정원에서 부부처럼 늙어가던 두그루의 모란도 때마침 꽃봉오리를 지폈다.

처마를 틀어올린 지붕 아래로 어디선가 매화향이 가득히 번져온다. 호기심많은 여왕은 한옥의 구석구석을 찬찬히 살펴본다.

이윽고 전통한과로 장식된 생일 수라상을 받은 여왕은 일어서기가 못내 아쉬운 듯 방명록에 사인하고는 밖으로 나온다. 마당에서는 어느새 하회 별신굿 탈놀이가 준비돼 있다. 각시. 양반. 부네. 백정. 할미. 이매. 선비. 초랭이.중등 9개의 하회탈 (국보제121호) 를 쓰고 추는 탈춤. 춤사위와 가락이 신명에 겨운지 여왕은 연신 함박웃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셰익스피어 연극만큼 훌륭한 마당극에 여왕은 놀라는 표정이다. 얼마후 막이 끝났다. 유니온 잭을 흔들며 맞아준 하회마을 사람들의 따뜻함에 여왕은 나무를 심어 보답하고는 승용차를 타고 예천으로 가는 길에 있는 봉정사 (672년 창건)에 들른다.

고요한 산사. 맑게 울려 퍼지는 풍경소리와 대숲을 지나는 바람소리. 여왕은 일주문을 지나 극락전 앞에 선다. 그리고 가장 오래 된 목조건물이라는 설명에 다시 한번 극락전을 바라본다.

미려한 단청으로 둘러싸인 대웅전 앞에선 은은한 향내 탓인지 성공회 신자인 여왕도 잠시 불심에 젖는 듯하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그 동방의 나라에서도 동쪽 끝 안동. 여왕이 안동은 찾은 까닭은 아마도 조상 대대로 충효의 유교적 전통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온 안동사람들의 고결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동 = 이순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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