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토크쇼] 욕망 / 김수현 vs 임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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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요즘 장안의 화제중 하나가 SBS 드라마 '청춘의 덫' 이다. 사랑과 증오, 그리고 욕망은 얼마나 사람을 비굴하게 만드는 지. 멋진 수사로 작품을 화장하려는 대개의 작가들과 달리 일상의 거침없는 언어로 우리의 치부를 꿰뚤어 보는 김씨와 함께 바로 지금 우리의 자화상을 돌이켜본다.

문학평론가 임우기씨가 욕망이 부글대는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평창동 김씨의 집에서 김씨를 만났다. 임씨는 지난해 말 단행본 '김수현 드라마에 대하여' 를 펴냈다.

◇ 임우기 = 세상은 물질적 욕망의 전쟁터가 된 지 오래입니다. '청춘의 덫' 에서도 물욕과 사랑 사이에서 배신과 복수의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대중들은 여기에서 사랑과 배신과 복수의 과정에 탐닉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이 과연 바람직할까요.

◇ 김수현 = 내 드라마엔 엄밀히 말해 인간의 욕망에 대한 선과 악의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욕망은 삶의 숙명적인 조건이니까요. 나는 욕망에 충실한 각 인물이 당한 처지와 심리를 그때 그때 떠오르는 대로 써나갈 뿐입니다. 대중의 탐닉은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는 것이어야 겠지요.

◇ 임 = 배신한 동우 (이종원)에게 복수하는 윤희 (심은하) 나 불안해하는 동우의 심리묘사는 선악의 구분을 넘어서 때론 아주 인간적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특히 치매에 걸려 순간순간 욕망에 따라 헛말을 쏟아대는 할머니 (정애란) 는 '청춘의 덫' 이 욕망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욕망의 최후나 덧없음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와 관련된 듯 합니다.

◇ 김 = 그런 분석도 가능하겠네요.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그저 내가 만든 인물들을 열심히 구체화할 뿐입니다.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 존재의 이유가 있고 그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려는 것이 작업에 임하는 기본 자세입니다. 그러니까 드라마를 보며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 역시 시청자의 몫이지요.

◇ 임 = 김수현 드라마의 두드러진 주제의식 중 하나는 가정 (혹은 가족) 문제입니다.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같은 작품에선 화목한 대가족의 모습이 재미있게 펼쳐집니다. 그러나 '청춘의 덫' 에선 가족 갈등이나 결손이 두드러진 모습입니다. 과연 가정이란 무엇이며, 나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천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 김 = 우리 삶의 출발과 배경.과정.마무리가 다 가족.가정이라는 그릇에 담겨있는 것 아닌가요. 사람의 보금자리로서의 가정은 내게 늘 화두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가족을 알면 세상을 안다' 이렇게 되나요.

◇ 임 = 극중의 동우에겐 가난이 윤희에 대한 배신의 직접적 동기가 됐습니다. 선생님의 많은 작품 속에서도 가난한 계층 출신 주인공이 빈곤을 극복해 가는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가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 김 = 가난의 상황은 이해돼야 하고 극복되도록 노력해야겠지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 아닙니까. 분명한 것은 가난에게 정신적으로 굴복해서는 안되겠지요.

◇ 임 = 선생님 드라마엔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여성상이 자주 등장합니다만 이번 작품에선 윤희의 헌신적 사랑이 증오로 바뀌고 있는데.

◇ 김 = 사랑에는 맹목이란 말이 있죠. 맹목적 사랑은 순수하고 투명하지요. 우리 세대엔 그런 사랑을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보았습니다. 나는 그런 사랑이 어느 때나 있고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신세대라 할 수 있는 영주 (유호정) 도 동우를 맹목으로 사랑하는 캐릭터입니다. 윤희의 헌신적인 사랑이 증오로 바뀐 건, 그럴 수 있는 충분한 동기를 주었다고 생각하고, 또 헌신적이었던 만큼 무섭게 증오할 수도 있습니다. 헌신도 증오도 동전 앞뒤처럼 사랑의 두 얼굴 아닐까요.

◇ 임 = 그렇다고 이 드라마의 작의 (作意) 나 방향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습니다.

◇ 김 = 글쎄요. 나는 아무 것에도 의미라는 단어를 써본 적이 없어서요. 직업이든, 인간관계든 내가 판단해서 최선이면 그만입니다. 의미는 평론가들이 만드는 것 아닙니까. 단지 자기들이 쳐놓은 욕망의 덫에 자기들이 치이는 꼴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물질.명예.성취 같은 것에 대한 지나친 욕망은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그것을 좀 얘기하고 싶었어요.

◇ 임 = TV드라마는 근본적으로 홈드라마 성격을 갖습니다. 때문에 지극히 대중적이며, 그러기에 많은 윤리적 기준들에 의해 간섭받기 마련입니다, '청춘의 덫' 도 20여년 전 불륜을 그렸다는 이유로 외압에 의해 중단된 바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예술의 대중성과 윤리성은 무엇입니까.

◇ 김 = 미혼모 문제가 심각한 사회 이슈로 떠오른 마당에 미혼모에 대해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이해하려는 마음이고, 그런 이해를 통해 윤리성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으로 봅니다. 대중이 목마르고 가려워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대중성 아닙니까.

◇ 임 = 선생님은 사랑.욕망.가정 등 변하지 않는 것, 변해선 안될 것을 다룬다는 점에서 '고전적' 입니다. 기발한 것, 튀는 것이 문화의 본령인양 치부되는 오늘날 '청춘의 덫' 이 대중으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 우리 문화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가를 반성하게 합니다.

◇ 김 = 고전적이다구요.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20대 처녀적부터 오십대 중반인 지금까지 결국 인간의 문제를 그려왔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엔 사회적 항심 (恒心) 이 부족합니다.

◇ 임 = 동감합니다. 우리 문화의 근본적 취약점은 분야.소재에 구분없이 쉽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식어버리는 것입니다.

◇ 김 = 비유컨대 라면만 끓여대는 분위기입니다. 이전에 '사랑하니까' 가 호응이 낮으니까 일제히 '김수현은 죽었다' 고 했다가 이제는 '부활했다' 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수십번 죽었다 살아난 셈이지요. 설혹 작품이 좋지 않더라도 '아 이젠 김수현이 한계에 왔구나' '열심히 일하더니 이젠 어쩔 수 없구나' '이런 것이 인생이구나, 서글프다' 는 식으로 말하면 안됩니까. 꼭 저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좀더 고급스러워져야 합니다. 누구를 기리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못해 표상이 없는 것 아닙니까.

정리 =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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