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밀레니엄 인터뷰] 앤서니 기든스 런던정치경제대학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앤서니 기든스 런던정치경제대학 (LSE) 학장의 지난해 10월 방한 (訪韓) 이후 한국에서는 '제3의 길' 이 향후 자본주의의 대안체제로 적합한지에 대한 논란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켜가는 수단으로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이론적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어울리지 않는 백화점식 주장이라는 비판이 팽팽히 맞선다.

이에 새 천년을 앞두고 과연 '제3의 길' 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대안체제를 찾을 수 있는지를 짚어 보는 밀레니엄 인터뷰를 마련했다.

지난해 중앙일보의 보도가 인상적이라, 감기를 앓고 있음에도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준 기든스 교수를 이 대학 박사과정에 다니는 이재강씨가 본지를 대신해 학장실에서 만났다.

- 학장님이 지난해 한국에 다녀가신 이래 '제3의 길' 이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웃음)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책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토론도 활발히 전개됐으면 합니다. "

- 지난해 말 한국 방문 때 첫인상은 어떠했는지요.

"3일간 짧게 서울의 극히 일부분만 봤기 때문에 인상을 말하기가 곤란하군요. 개인적으로는 '제3의 길' 에 보여주신 한국민들의 많은 관심과 진지한 토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평소 한국사회는 한마디로 역동성이라고 느껴왔습니다. 30여년 동안 급속하게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성공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에 수반되는 여러 난관들도 함께 겪어왔기 때문에 더욱 역동적인 사회라고 봅니다. "

-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위기의 실체가 무엇인가요.

"한국이 선진사회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구조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즉 성장 제일주의로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제 새로운 틀을 요구하는 전세계적 움직임에 의해 제동이 걸린 셈입니다. 한국이 지금껏 달려온 길은 제1단계 산업화였습니다. 하지만 서구사회의 경험이 보여주듯 한국사회는 급격한 제1단계 산업화가 가져다준 폐해들을 이겨내야 하는 과도기에 처해 있습니다. 즉 제1단계 산업화가 야기한 공해문제가 심각한데, 제2단계 산업화 초기에 들어서는 이제 '환경친화적' 산업화를 추진해야 합니다. 그것은 제2단계 산업화를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

- 한국 학계 일각에서는 '제3의 길' 이론이 시장중심적인 신자유주의와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적당히 섞어놨기에 자본주의의 대안체제가 될 수 없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러한 비판에 동의할 수 없군요. 무엇보다 '제3의 길' 은 국가중심적이고 복지국가 의존적인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와는 완전히 다릅니다.누구도 전통적인 사민주의가 이 시대에 적합한 모델이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 신자유주의의 시장중심적인 철학은 이미 한계에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전통적 사민주의나 신자유주의는 과거 양극체제에 적합한 모델들입니다. '제3의 길' 은 정확히 말해 이 양자를 뛰어넘는 틀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회는 신자유주의의 '정글' 이 아닙니다.

'제3의 길' 에서 말하는 '연대' 의 사회는 신자유주의가 지향하는 개인주의 사회가 아니고 약자를 보호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입니다. 국경없는 세계경제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는 약자들을 위한 보호장치를 고려하지 않는 신자유주의는 지양돼야 합니다. 지금 유럽에는 대부분 중도좌파 정권이 집권하고 있지요. 이는 유권자들이 신자유주의도, 전통적 사민주의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제3의 길' 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3의 길' 은 새로운 토론의 장이자 진보의 수단입니다. "

- 학장님의 전략이 정치적 후진성, 자본주의의 천민성, 전통과 근대의 단절, 냉전시대의 유산이 혼재하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 어떻게 접맥될 수 있을까요.

" '제3의 길' 은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신비의 공식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3의 길' 은 새로운 토론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하고 또한 그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전략입니다. 급속히 확산되는 지구화는 단순히 금융시장의 확대재편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통치구조, 변화하는 문화형태, 제도적 재편 등을 통해 지구 전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제3의 길' 을 단순히 한국적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것은 무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한국적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특히 탈냉전시대에 상당한 기간 다른 이념과 체제 아래서 살아온 남북한이 지구화의 물결에 대응해 어떻게 성공적인 통일을 이뤄낼지가 관심거리입니다.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구화의 조건 아래서 '제3의 길' 은 냉전의 유산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지요. "

- 자본주의 시장의 확산과 더불어 다가오는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에 걸맞은 국가의 역할은 과연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는 국가보다는 정부에 대해 더 많은 논의를 전개해야 합니다. 지구화의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제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봅니다. 지구화에 대응하기 위해 각 지역의 문화적.경제적 공동체를 형성할 필요성이 대두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민족문제는 스페인뿐만 아니라 프랑스와도 이해관계를 갖는데, 국가나 민족의 관점에서 그 문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부역할의 외연적 확대를 통해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구화 시대에는 국가나 민족의 역할은 감퇴되고, 정부의 역할이 증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는 초국가적.지구적 상황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 한국은 권위주의적인 자본주의 발전전략을 취함으로써 그 후유증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역설적으로 과거의 권위주의적 권력이 민주주의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탈린이 사망했을 때처럼 한 체제가 붕괴하고 새로운 환경에 봉착할 때 사람들은 과거체제의 카리스마적 인물에 대한 향수를 갖게 마련입니다.

특히 경제위기 시대에는 그에 대한 심리적 반응으로 과거 권위주의정권에 대한 향수를 사람들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한국에서 더 많은 민주화가 진행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세계적으로 이제 권위주의와 같은 '강성 권력 (hard power)' 은 지구화의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모델로서는 매력을 잃었습니다. 기능적으로 사회를 원활히 운영하는 데 비능률적이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지구화라는 거대한 물결이 도도히 밀려오는 열린 세계에는 민주주의의 '연성 권력 (soft power)' 이 더 적절합니다.

지구화된 열린 세계에서는 이제 개인도 정부와 마찬가지로 다양하고 신속한 정보를 얻고 또 공유하고 있기에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강압적으로 권력자의 의지를 실현하는 권위주의.독재주의가 설 땅은 더 이상 없습니다. "

- 한국에서도 시민사회가 개혁에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적절한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요.

"한국의 경우 시민사회가 정부의 내부적 민주화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하는 것과 동시에 시민 개개인의 일상생활에서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한국은 이중적인 민주화가 요구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여기에는 민주적인 시민사회의 성장이 관건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

- 지금 한국사회에는 국가중심으로 발전을 모색하는 아시아적 발전전략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로버트 루빈이 말했듯이 정부는 경제발전의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여기서 정부는 국가와는 별개입니다. 지구화 시대는 국가의 개혁과 정부의 적극적 개혁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유럽지역 등 모든 나라들에 적용됩니다.

국가는 대개 너무 경직적이고 관료적입니다.

그것은 한물간 상징주의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통적 국가와는 별개의 적극적인 민주주의 정부의 확립입니다.

한국의 경우도 정부의 민주적 역할을 확대하면서 동시에 국가의 잘못된 관행과 비민주주의적 요소들을 혁신적으로 개혁해 나갈 때 한 차원 높은 경제발전의 기틀이 마련되리라고 봅니다. "

정리 = 김창호 전문기자.유권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