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과도매상 김백천씨,채소 모아 이웃 돕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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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나야 정성들을 모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실어 나르느라 몸 고생을 좀 더 할 뿐이지 실제로 돕는 사람은 여러 상인들입니다."

광주시 북구 각화동 농산물도매시장의 광주청과㈜ 중도매인 김백천 (金栢天.55) 씨는 8년째 시장의 약간 시든 야채를 모아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있다.

연간 매출 26억여원의 큰 장사를 하고 있는 그는 거의 매일 경매시간인 오전 6시께부터 3시간여를 빼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웃사랑에 쏟고 있다.

金씨는 오전 9시께면 가게를 부인과 두 아들에게 맡기고 '사랑의 종' 이란 글귀가 쓰인 1t 화물차를 몰고 도매시장 안을 돌기 시작한다.

동료 상인들에게 눈웃음과 농담을 던지며 2시간 가량 기웃거리고 다니다 보면 트럭엔 어느 새 무.배추.시금치.당근.양파.상치 등 각종 야채가 가득 찬다.

하루 20~30명이 전날 팔다 처져 싱싱하지 않아 제 값을 받지 못해 그렇지 먹는 데 전혀 이상 없는 재고들을 조금씩 실어주는 것. 그날 경매 받는 것까지 한 아름씩 선뜻 내놓는 경우도 적지 않다.

金씨는 오전11시께 도매시장을 출발, 광주.장성.화순 등의 사회복지시설에 찾아가 나눠주는데, 7~8곳을 돌다보면 어느덧 하루 해가 저문다.

"92년 봄 수녀들이 자주 와 물건을 많이 사가긴 하는데 어찌나 값을 깎으려고 하는 지 어떤 때는 신경질이 날 정도였어요. " 뒤늦게 이들이 까리따스수녀회 성요셉양로원 수녀들로, 오갈 곳 없는 노인 50여명을 잘 먹이고 싶은데 돈이 넉넉지 못해 그랬던 걸 알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초등학교만 마치고 얼음과자.떡 행상과 구두닦이 등을 하며 어렵게 컸던 어린 시절에 기억이 미치자 절로 눈물이 났고, 야채를 공짜로 대주기 시작했다.

이들 외에 다른 불우 이웃들도 돕기로 하고 동료 상인들의 물건까지 모으러 다녔다.일부 상인들은 20여년전부터 야채 거래를 하고 장사 밖에 모르던 金씨의 느닷없는 행동에 "뭔가 꿍꿍이 속이 있지 않겠느냐" 고 의심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뜨거운 성원이 이어졌다. 걷히는 물량이 늘어 이젠 양로원.보육원.장애인시설.사랑의 식당 등 23곳의 식탁을 책임지게 됐다. 요즘엔 간혹 金씨의 개인 사정으로 '사랑의 종' 차가 돌지 않으면 "왜 물건을 가지러 오지 않느냐" 는 상인들의 독촉이 오히려 성화같다.

金씨는 "초기엔 썩은 것을 준 사람이 있어 속 상한 적도 있었으나, 요즘엔 모자라는 품목을 반강제로 빼앗아올 수 있을 만큼 동료 상인들이 협조해주고 있다" 고 말했다.

지난 9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천상의 복을 약속한다' 는 강복장 (降福狀) 을 받기도 한 그는 시설들의 부엌살림에 대해 보지 않고도 알 만큼 훤하다.

장애인 15명이 사는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사랑의 집' 의 韓까타리리나 (63) 수녀는 "金씨가 7년째 주 2회씩 야채를 갖다 주고 있고, 어떤 품목이 떨어졌는 지까지 알아서 챙겨올 정도" 라고 밝혔다.

광주 = 이해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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