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시민단체의 제자리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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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두달 동안 계속되고 있는 경실련의 내분이 심히 우려스럽다.

경실련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시민운동의 대명사다.

과거의 경제정의 실현을 위한 금융실명제 실시 촉구, 토지공개념의 공론화, 재벌의 경제력 집중 완화 운동에서 최근의 국회의원 의정활동 감시, 정부예산 남용 비판에 이르기까지 경실련의 활동은 대단히 눈부신 것이었으며, 우리 시민운동의 역사의 한 장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위상을 갖고 있는 경실련은 지난 번 '테이프 사건' 으로 그 도덕성에 상당한 상처를 입은 바 있었는데 이번의 상근자들의 사무총장 연임 반대 요구와 일괄 사표, 그리고 집행부측의 간사 해임 조치로 또 한번 세간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었다.

아직 시민운동 혹은 비정부기구 (NGO) 의 연륜이 극히 짧은 한국에서 맏형 격인 경실련이 이러한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자발성을 생명으로 하는 단체에서 조직 '기강' 을 내세운 징계 조치나 '사퇴' 를 요구하는 집단행동이 발생한 것은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마치 이 조직이 대단한 권력기구이거나 금전적 이해가 얽혀 있는 조직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경실련이 권력기구도 아니며 사업체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그렇다면 왜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한국의 시민단체는 강한 정책 지향성을 갖고 있으며, 대체로 시민 참여가 부족한 것이 특징이다.

양자는 상호 관련돼 있는데, 왜냐하면 시민의 소극성과 무관심이 전문가나 지식인의 정책대안 제시적 참여를 증대시켰으며, 역으로 이러한 엘리트 집단의 과도한 개입이 대중적 참여보다는 언론에 의존하거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는 운동 관성을 정착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경실련과 몇몇 시민단체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시민' 의 조직화와 적극적인 참여에 힘입은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90년대 들어서 전통적인 재야운동이 지지를 상실하게 된 공간을 치고 들어가서, 언론과 중간층에 어필할 수 있는 운동의 노선과 이슈를 개척함으로써 획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결국 이들 시민단체는 '도덕성' 이라는 자원으로 무장한 또 하나의 권력체가 되어,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제도 정치권으로 입성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경실련의 위기는 그것에 관계한 많은 전문가들이 조직 대표로서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정부와 정치권에 진출할 때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부터 경실련은 사실상 비정부기구로서보다는 권력권의 한 기둥이 돼 버렸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간부들의 의식을 지배했는지도 모른다.

한국처럼 제도 정치권의 흡인력이 강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역으로 말하면 정치권 밖의 공간이 그만큼 협소하다는 말이 된다.

그간 정당성의 빈곤을 겪은 정치권은 끊임없이 제도권 밖에서 인재와 아이디어를 수혈받아 왔고,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전문가 집단은 가장 매력적인 영입 대상이었다.

정치의 흡인력이 강하고 운동의 대중적 동력이 약한 한국에서 정치권은 운동의 성과를 쉽게 가로챌 수 있다.

그리하여 운동에 관계했던 엘리트들은 '출세' 의 길을 열어갈 수 있었지만, 운동의 성과는 시민사회에 축적되지 못했으며 바닥의 대중들이나 활동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경실련의 내분은 경실련이 이미 '지켜야 할' 많은 기득권을 가진 조직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지켜야 할 그 무엇을 가진 조직은 이미 '시민' 조직으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다.

시민운동의 목표는 시민운동이 필요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며, 운동가의 활동은 운동가가 필요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데 있다.

직업적 운동가의 수는 적을수록 좋고, 자신의 작은 시간과 돈을 쪼개는 자원봉사자와 이름없는 참여자는 많을수록 좋다.

시민단체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중앙조직의 지나친 비대화는 오히려 덫이 될 수도 있다.

시민운동의 본령은 풀뿌리의 동원에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이 그간 시민단체의 활발한 고소.고발.비판 활동으로 상당한 위기감을 느낀 기득권 세력이 쾌재를 부르면서 반격하는 계기로 작용하지 않기를 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이름도 없이 묵묵히 일하는 수많은 시민운동가들의 사기를 꺾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더욱 발전되고 확산돼야 한다.

김동춘 성공회대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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