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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왕을 정복한‘침실 권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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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정부
원제 Sex with the King
엘리노어 허먼 지음, 박아람 옮김, 생각의나무 416쪽, 1만9500원

애정 없는 정략결혼이 왕실을 지배하던 시기에 왕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사람은 정부들이다. 그들은 미모가 뛰어나거나 왕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만으로 왕의 공식 정부인 메트레상티트르 칭호를 얻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왕비보다 낮은 신분인 그녀들은 재능과 매력이라는 ‘판돈’을 가지고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애정기업’을 치열하게 운영해야 했다.

▶ 대부분의 왕들이 한명의 공식적인 정부만 뒀지만 찰스 2세(그림)는 여러 명의 정부를 둬 영국인들의 비난을 샀다.

엘리노어 허먼(Eleanor Herman)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출생. 타우슨 주립대학에서 저널리즘과 독일어를 전공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다양한 언어를 공부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가 발행하는 잡지 네이션스 앤드 파트너스 포 피스의 발행에 8년간 관여했다. 지금은 버지니아주 맥린에 살면서 여성의 시각에서 역사를 쓰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돈과 권력, 여자. 이른바 남성들이 본능적으로 품는 욕망의 대상이라고들 한다. 이 세 가지를 다 누리는 남자들을 같은 남자들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 욕망의 세 꼭지점은 곧 윤리와 도덕과 상반되는 경우가 많다. 윤리와 도덕은 본능과 탐욕을 제어하는 장치이므로 이 상반관계는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라도 다른 남자보다 더 많이 가진 남자는 곧장 다른 것을 추구한다. 남성 권력자가 돈과 여자를 탐하고, 남성 부자가 권력과 여자를 탐하고,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남자가 그 인기를 이용해 돈과 권력을 획득하는 것은 통속소설의 주된 갈등이기도 하다.

신권이 강력했고, 외척의 발호를 특별히 경계했던 조선시대에도 최고 권력자인 왕을 둘러싼 여성들의 갈등이 정치를 좌우한 때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숙종이다. 그 시절의 궁정 야사는 사극의 영원한 소재다. 하물며 서양의 절대왕정기야 어떠했으랴. 후계자 다툼과 직결된 애정 없는 외교적 정략결혼이 왕실을 지배하던 시기 왕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여성들에 대한 호기심은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궁금증이다. 그것은 이성과 감정, 부와 권력과 사랑이 함께 뒤섞여 우연이라는 누룩으로 발효한 역사의 술통 안쪽에 대한 호기심이다. 여성의 공식적 활동이 불가능했던 시기, 과연 부와 권력의 최고 정점에 이르렀던 남자들을 쥐고 흔들었던 여자들은 어떤 여자였으며, 그 여자들은 후세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 사진 왼쪽부터 찰스2세를 위해 정조를 지켰던 넬 그윈, 도박꾼 몽테스팡 후작부인,
루이 15세를 대신해 절대권력을 행사한 마담 드 퐁파두르, 나폴레옹에게 버림받은 마리아 발레브스카.

『왕의 정부』는 역사적 사실에 현미경을 들이대며 바로 그 여자들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책이다. 언제라도 아름다운 꽃을 딸 수 있는 절대권력의 정원과, 낮은 신분의 여성이 지배하지만 사랑의 힘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향기롭고 은밀한 내실이라는 남성과 여성의 두 가지 환상을 걷어내면서 이 책은 유럽의 몇몇 왕실에서 최종 권력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던 여성들의 생애와 일화들을 추적한다.

당연하게도 그 생애와 일화는 우리가 막연히 품고 있는 환상과 부합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흔히 왕자나 공주라고 하면 일단 미모를 상상한다. “왕은 미녀들만 골라 결혼했을 텐데 자식들은 다 미남미녀 아니겠어?”하는 농담이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로또 당첨자도 희비애환이 있는 것인데, 세상 일이 그렇게 뜻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군주제 시대 왕가의 결혼이 무엇보다도 외교와 정략적 고려, 후계자 생산에 바쳐진 것은 동과 서가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근친혼이 횡행하고 친정 왕가의 권력이 공주 당사자의 미모를 보충하거나 덮어 가리던 때다. 사진도 없던 시절 군주들이 고려할 수 있는 매력이라고는 들려오는 평판과 중신용 초상화 몇 점 정도였을 것이다. 초상화 한 점에 평생의 희비가 엇갈린 것이 한 원제와 왕소군뿐이었겠는가. 마음에 안 드는 짝과 결혼한 권력자가 다른 매력에 눈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과 이합집산이 거듭되었던 유럽의 왕실에서 마음대로 정부(情婦)를 거느리고 금전적인 보상을 해줄 수 있는 탄탄한 권력과 재정의 소유자(혹은 소유 왕실)는 몇 되지 않았다. 시대와 문화와 정치에 따라 왕의 정부에 대한 처우도 제각각이었다. 교황청보다도 경건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스페인의 가련한 군주들은 아무리 재정이 탄탄해도 프랑스의 군주들처럼 화려한 정부들을 자랑할 수는 없었다. 아름다운 여성을 정부로 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프랑스 군주들을 건너다보며 종교재판을 집행해야 했던 경건하고 독실한 스페인 군주들은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여성 측에서도 미모가 뛰어나거나 왕의 애정을 받는다는 것만으로 왕의 공식 정부인 메트레상티트르 칭호를 얻을 수는 없었다. 미모는 변하고 애정은 식는다. 그 이상의 장점을 보여 왕의 마음을 시시각각 쟁취(!)하지 않는다면 어찌 ‘공식 정부’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으리오. 사실 왕의 공식 정부란 지위가 얼마나 고역이었던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 책의 한 구절만 들여다보면 된다. “정부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피곤해도 왕과 기쁘게 대화를 나누고, 몸이 아플 때에도 왕과 관계를 갖고, 왕의 온갖 변덕을 감내하고, 왕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들을 내놓고, 왕의 심기가 불편할 때에는 위로를 해주고, 왕의 발을 마사지하고, 왕의 집을 꾸미고, 왕의 아이를(때때로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까지도) 키우는 등 모든 일을 기쁘게 해낼 각오를 해야 했다.”

여성이 사회에 진출해도 별볼일 없는 사회였기에 망정이지, 그 정성이라면 무슨 일을 한들 성공을 못하겠는가. 그래도 절대권력자의 정부라는 광휘 속에서는 이런 것도 감내할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한 가지 더. 이 책에서 ‘왕실 정부의 정수’라고 칭할 정도로 강력한 왕의 강력하고 모범적인 정부 루이 15세의 마담 드 퐁파두르는 불감증에 만성 질염이었고 말년에 편두통과 병치레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녀는 죽을 때까지 왕의 요구를 거절한 적도 없고 병 치레를 싫어하는 왕에게 아픈 티를 낸 적도 없다.

왕의 정부들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도 재미있다. 포악한 황금빛 암사자와 같은 악녀형,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왕을 한때 푹 빠지게 하지만 결국 시시해지는 백치미인형, 전체적으로 못생겼지만 확실한 장점 한 가지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추녀형. 왕의 여인은 왕만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이들에게도 모두 생활이 있다. 왕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왕비와 자리다툼도 벌여야 하고, 명목상의 남편인 왕의 애정 생활을 방해하지 않게 손도 써 놓아야 한다. 궁정 안 세력에 민감하지 않으면 자리를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왕의 애정이 식거나 왕이 죽을 때를 대비해 미리미리 돈도 챙겨놓지 않으면 안 된다. 궁정 사회에서 어차피 왕비보다 낮은 신분인 정부들은 재능과 매력이라는 판돈을 가지고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애정 기업을 치열하게 운영해야 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서점 한구석에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의 역사를 다룬 책들이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 그런 책들을 재미있게 읽기는 하지만 읽고 나서는 항상 약간의 죄책감에 시달렸다. 참 공들여 쓴 책일 텐데 나는 너무 쉽게 읽는 게 아닐까. 남의 지적 노고를 이렇게 쉽게 소비해도 되는 걸까.

그런데 오히려 노골적으로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풀어주었기 때문인지 『왕의 정부』는 평소에 느끼던 그런 죄책감까지도 슬그머니 덜어주었다. 그래, 이것은 역사의 알려지지 않은 자락에 바탕을 두고 여름을 겨냥해 나온 시원한 ‘교양 오락 도서’인 것이다. 어차피 TV와 영화에서는 한여름밤의 신데렐라 판터지를 늘 반복 재생산한다. 내주에도 볼 수 있고 내년에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번쯤 시간을 내 더욱 흥미진진한 역사 속의 실체로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진지하고 주의 깊은 독자라면 문화사나 미시사적 맥락에서 신데렐라 환상의 실체와 뿌리까지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충분히 잘 읽히고 재미있을 것이다.

송경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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