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념논쟁에 밀린 벽초 문학비 건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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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보훈가족에 대한 대접은 소홀히하면서 '전범자' 를 추모하다니 말이 됩니까. "

"문학적 업적을 기리자는 것이지 사상과 월북행적까지 추모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

지난 1일 오후 1시쯤 충북괴산군괴산읍동부리 대한상이군경회 충북지부 괴산지회 사무실에서는 지난해 10월 읍내 제월리에 건립된 벽초 (碧初) 홍명희 (洪命憙) 문학비를 놓고 보훈단체 회원과 지역 문인들 사이에 때아닌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지역 상이군인회.전몰군경유가족회.전몰군경미망인회 등 보훈단체 회원들은 "6.25때 다치고 부모형제를 잃은 사람이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자진월북해 부수상까지 지낸 인물을 기린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며 철거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문학비 건립을 주도한 都종환 (시인).金승환 (충북대교수).조정주 (시인) 씨 등 충북민예총.괴산문학회 관계자들은 "비록 문학비라지만 사전에 상의하지 못해 죄송하다" 며 이해를 구했다.

하지만 보훈단체 회원들은 막무가내였고 결국 문인들은 "철거를 생각해 보겠다" 는 말을 남기고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홍범식 및 홍명희 생가복원추진위원회' 의 활동은 한일합병에 항거, 자결한 벽초의 부친 홍범식 (洪範植) 선생만을 대상으로 한 추모로 그칠 공산이 커졌다.

오죽 전흔 (戰痕) 이 깊었으면 반세기가 다 돼가는 지금까지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무리 그렇더라도 정부가 미전향 장기수까지 풀어주는 마당에 문학비 하나 마음대로 세우지 못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괴산 = 안남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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