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만 바꾸고 '日원작 그대로'-영화 '산전수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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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영화제작에 있어서 '리메이크' 란 과연 어디까지를 말하는가. 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일본영화 '비밀의 화원' (야구치 시노부 감독) 을 리메이크한 '산전수전' (구임서 감독) 의 개봉 (27일) 을 앞두고 영화계에서 '리메이크' 의 범주와 창작자의 직업윤리를 놓고 논쟁이 벌어질 조짐이다.

'산전수전' 은 어려서부터 돈을 너무도 좋아한 여자 주인공이 현금 5억원이 든 가방을 찾기위해 벌이는 도전과 모험을 코믹하게 그린 영화. 시사회를 통해 본 '산전수전' 은 원작인 '비밀의 화원' 의 콘티 (구체적인 장면묘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시나리오) 를 그대로 옮겼다는 지적을 피하지 못할 정도로 원작과 거의 같다.

원작의 아이디어나 상황설정, 등장인물들을 차용하는 선을 넘어서 세트와 등장인물의 자세와 움직임, 그리고 카메라 샷까지 그대로 '재현' 해낸 것이다.

일본배우가 한국배우로, 일본어가 우리말로 바뀌었다는 사실 외에는 두 작품에서 차이점은 찾기 어렵다.

주인공이 입은 줄무늬 티셔츠, 주요 소품인 노란색 가방, 등장인물의 독특한 표정 등 세부묘사까지도 원작과 다르지 않다.

차이점이 있다면 '비밀의 화원' 에선 왼쪽에서 달려온 차와 충돌할 뻔 한 장면이 '산전수전' 에선 오른쪽으로, 일부 장면의 카메라 위치 등이 약간 다르다는 정도. 따라서 '산전수전' 만을 놓고 보면 새로운 장르와 캐릭터 연기에 도전한 구임서 감독과 주연을 맡은 김규리의 연기가 주목받을 만 하지만, 문제는 원작을 그대로 '복사' 한 영화를 놓고 연기와 연출력을 거론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리메이크작품에 기대할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이나 새로운 미장센 창조 등은 '산전수전' 에서 거의 배제됐기 때문이다.

제작사인 태원엔터테인먼트가 일본 제작사로부터 원작 판권을 사들인 만큼 일본영화를 그대로 베꼈다고 해도 법적인 문제는 없다.

구 감독은 "본래 한국적 상황에 맞게 각색한 시나리오가 있었으나 문제가 많아 차라리 원작에 충실하게 연출하는 쪽을 택했다" 며 "제작에 시간적 여유가 없어 새로운 것을 가미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고 설명했다.

그러나 조희문 상명대 (영화과) 교수는 "법적 문제는 거론할 수 없다 해도 원작을 새롭게 '가공' 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은 한국 제작진의 직업정신이나 제작 노하우 축적 등을 생각할 때 다시 돌아보아야 할 문제" 라고 지적했다.

지난해에는 일본 영화 '실락원' 이 리메이크됐으며 지금도 일본에서 히트한 영화 '링' 이 한국에서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이같은 일본영화 리메이크 붐은 일본 영화가 개방되지 않은 시점에서 '복사품' 을 생산해 이익을 챙기려는 제작사의 얄팍한 상혼이라는 비난이 제기되고 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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