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산책] 동부서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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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제국의 수도 베이징에는 강이 없다. 대신 도시의 정중앙 남북을 잇는 용맥(龍脈)을 축으로 좌우로 나뉜다. ‘동부서귀(東富西貴)’는 예부터 베이징을 묘사하는 말이다. 동쪽에는 돈 많은 부자들이, 서쪽에는 지위 높은 고관대작들이 많이 살았음을 뜻한다. 이 말은 대운하와 깊은 연관이 있다. 수(隋) 양제(煬帝)가 만든 대운하 북단은 현재 베이징 남동쪽의 퉁저우(通州)구였다. 원(元)대에는 지금의 허우하이(後海) 인근 적수담(積水潭)까지 운하가 이어졌다. 남방의 물자들은 이곳에서 하적됐다. 자연히 시장이 생겼고 거상들이 모였다. 대도(大都)의 최고 번화가는 이곳이었고 동부서귀 현상은 아직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명(明)대 들어 베이징 성곽이 현재 이환로(二環路)를 따라 세워지면서 적수담까지 올라오던 운하가 끊겼다. 숭문문(崇文門) 이남이 운하의 종점이 됐고, 이곳으로 상인들이 몰렸다. ‘동부(東富)’의 유래다.

옛 고관들은 상인들과 이웃하기를 꺼렸다. 관리들은 성곽 선무문(宣武門) 이남에 모여 살았다. 명대에 활성화된 과거제도도 ‘서귀(西貴)’에 한몫했다. 과거를 보러 올라온 수만 명의 선비들이 선무문 남쪽에 밀집한 동향 회관에 머물렀던 것. 책시장 유리창(琉璃廠)도 이곳에 생겼다. 당시 문인들의 필묵향은 상인들의 동전내와 섞일 수 없었다.

청(淸)대 후기 서양인들이 베이징으로 몰려들었다. 바다를 건너온 서양인들은 톈진(天津)에 상륙해 퉁저우를 거쳐 베이징으로 올라왔다. 서양인들은 장사치였다. 베이징 동쪽이 취향에 맞았다. 선무문 일대의 중국 문화는 낯설었다. 많은 외국인이 동쪽에 거주했다. 자연스레 싼리툰(三里屯) 일대에 대사관이 밀집했다. 당시 외국인들은 부자였다. ‘동부’가 강화됐다.

‘서귀’도 지지 않았다. 베이징 서북쪽 중관춘(中關村)에 유명 대학들이 건립됐다. 마치 명대 과거를 보러 온 선비들이 북적이던 모양새다. 댜오위타이(釣魚臺) 영빈관, 공산당 회의가 자주 열리는 징시빈관(京西賓館)도 모두 서쪽에 자리 잡았다.

현재 베이징 동부 차오양(朝陽)구에는 신흥부자들이, 서부 스징산(石景山)구에는 고위관료와 군인들이 많이 산다. 재물과 권력은 조화를 이뤄야 하건만 최근 베이징에선 부자들도 고귀함을 추구하고 권귀(權貴)들도 재물을 찾는다는 소식이 잦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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