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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브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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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유럽 금융업자들이 세운 파나마운하건설회사의 공사 책임자는 수에즈 운하의 건설 영웅인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였다. 그는 수에즈 운하처럼 파나마 운하도 해면과 같은 높이의 수평식 운하로 만들려 했다. 파나마와 수에즈 지역의 자연환경이 다르므로 파나마운하는 갑문식 운하로 건설되어야 한다는 브뤼슬리(Lepinay de Brusly)의 주장을 레셉스는 묵살했다. 대가는 참혹했다. 열대우림 지역으로 평균 높이가 해발 150m인 파나마는 해발 15m의 사막형 기후인 수에즈와 전혀 달랐다. 아무리 땅을 파도 운하 완공은 요원했고, 8년간 2만2000여명이 열대병으로 사망한 뒤 1889년 파나마운하건설회사는 파산했다. 십수년 뒤 다시 파나마 운하 건설에 나선 미국은 브뤼슬리의 갑문식 아이디어를 채택했고, 운하는 1913년 완공됐다.

윤석철 서울대(경영학)교수는 레셉스의 실패 이유로 '과거에 성공한 사람이 자기 능력과 방법론을 우상화하는 과오'를 꼽는다. 수에즈에서 성공한 방법을 우상화하다가 파나마에서 실패했다는 얘기다. 이런 현상을 아널드 토인비는 '휴브리스'(hubris.오만)라고 불렀다. 역사를 바꾸는 데 성공한 창조적 소수가 그 성공으로 교만해지고, 추종자들에게 복종만을 요구하며,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여 지적.도덕적 균형을 상실하고 가능과 불가능에 대한 판단력까지 잃게 되는 현상이 토인비가 말하는 휴브리스다. ('경영학의 진리체계', 경문사)

그리스어의 휴브리스는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려는 오만'을 뜻했다.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모든 것을 알아내려 했던 주인공의 비극적 결함이 휴브리스였다. 기독교에서는 이브가 뱀의 유혹에 빠진 게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려는 휴브리스 때문'이라고 말한다.

토인비는 역사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이 용어를 빌려왔다. 정권을 잡은 창조적 소수가 자신들의 성공 방식을 절대적 진리인 양 우상화해 실패하거나 갈등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성공한 기업가가 과거의 경영방식만 고집해 실패하는 것도 휴브리스의 우(愚)를 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갈등이 빚어지는 것도 휴브리스 탓인지 모르겠다. 윤 교수는 휴브리스에서 벗어나려면 자기반성에 소홀하지 않으면서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충고한다.

이세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