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탐방] 하. 한국을 비롯한 신흥시장 전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월가의 우두머리격인 메릴 린치의 로고는 황소다. 월가에서 황소는 주가상승을 뜻한다. 그런데 이 회사의 수석투자전략가인 척 클라우는 최근 미국 주가에 대해 아주 비관적이다.

그가 권하는 자산배분 (주식 40%, 채권 55%, 현금 5%) 은 상승사이클 꼭대기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업계 라이벌중 하나인 리만 브라더스의 자산배분 (주식 80%, 채권 20%, 현금 0%) 과 비교해보면 메릴 린치가 얼마나 비관적인지 짐작이 간다.

미국 주가가 클라우의 예측처럼 본격적인 조정에 들어간다면 주식에 들어있는 그 많은 돈이 어디로 옮겨 갈까. 안전한 채권이 제1순위라는데 별로 이견이 없다. 조정이 급격할수록 이 경향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다음은 당연히 해외투자다. 미국투자가들은 전통적으로 국내시장에 몰두해왔다. 막대한 연금 자금의 10%가 해외에 투자돼 있을 뿐이다.

"가끔 해외로 눈을 돌리는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상승사이클의 마지막 단계" 라는 것이 빌 디닝 메릴 린치 신흥시장 투자전략가의 지적이다.

89년 베르린 장벽이 무너지자 미국 뮤추얼펀드의 3분의 1이 유럽으로 몰려갔고 93~94년에는 아시아로 이동했다. 지난 수년간은 미국국내시장의 활황과 신흥시장의 불안정으로 해외투자는 거의 얼어붙다시피 했다.

다행히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국을 비롯한 유럽 중앙은행들이 유동성을 집중 공급, 앞서 해외시장에 관심이 집중됐던 때와 비슷한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 여기에 미국 주가가 조정에 돌입하는 '호재' 가 발생한다면 '99년은 신흥시장의 해' 라고 할만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더욱이 지난 수년간 비난의 대상이 됐던 헤지펀드는 지난해 러시아위기 때 혼줄이 난 상태라 소위 '핫머니' 에 의한 폐해는 덜할 거라는 전망이다.

문제는 신흥시장의 상황이 과거와 같지 않다는데 있다. "일부 국가는 겨우 위기를 벗어나고 있는가 하면 일부는 이제 막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는 것이 에이미 폴스 모건 스탠리 신흥시장 리서치헤드의 설명이다.

98년중 인도네시아.러시아.브라질은 장기지불능력과 단기유동성이 급격히 악화된 반면 한국.태국은 크게 호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은 유동성위험에 민감한 투자가들을 설득할 수 있는 최선의 무기를 확보한 셈이다.

국제유동자금이 만일의 사태를 피해 선별적으로 움직인다 하더라도 한국이 투자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단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 외국신용평가기관들의 연이은 신용등급 조정도 도움이 될 전망이다.

빌 디닝은 "일본.싱가포르를 제외한 신흥아시아, 특히 한국과 태국을 좋게 보고 있다" 고 말한다. 메릴 린치는 국제금융공사 (IFC)가 권하는 한국의 신흥시장 포트폴리오 비중 9.3% 보다 훨씬 높은 14.4%를 추천하고 있다.

월가에서 만난 펀드매니저들은 한국의 주가가 지난해 100% 이상 (달러기준) 오른 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주가가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 4~5년간의 대세하락에서 빠져나오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유망하다" 는 것이다. 그 대신 "이제 개별기업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고 주문한다.

다시 말하면, 구조조정에 성공, 부채비율이 낮아지고 이익이 불어나는 사례를 보여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경제지표를 보는 경제분석가들과 실제 매수주문을 내는 펀드매니저들의 차이다. 따라서 이들은 실적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잡힐 하반기쯤에나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느껴졌다.

권성철 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