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들 아날학 국내접목 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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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국내에서도 아날학 출판작업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을 것인가.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철학이 자료의 정확성에 집착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게 바로 아날학. 아날리스트들은 경제.사회.문명을 둘러싼 인간의 일상성을 역사연구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최근 국내에서도 그 관련 서적출판 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이는 80년대 들어 프랑스 출판사의 역사총서 편집자들이 예외없이 아날리스트로 명명됐던 점을 감안할 때 의미있는 국면전환의 조짐으로 여겨진다.

동문선 신성대 (45) 대표는 스스로를 '아날 문외한' 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77년부터 6년간 외항선 기관장 생활을 하다가 85년 불쑥 출판인의 길로 들어서서는 동양학 특히 중국학과 문화인류.예술분야에만 집착해 오다가 지난해 '성의 역사' (장 루이 플랑드렝) '창부' (알렝 코르벵) 를 발행하면서 아날학 출판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리고 오는 6월 출판 예정으로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 전5권의 번역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조르주 뒤비의 대표적 아날학 저서 '전사와 농민' '날씨의 역사' 등도 올 봄 서점에 선보일 예정이다.

대만에서 중국미술사를 공부한 지호출판사 장인용 (43) 대표도 동문선의 신대표와 '아날 출판' 에 대한 접근방식이 유사하다. 학문적 이해 이전에 아날학의 개념확산 차원에서 출판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점에서 그렇다. 이 회사가 선보였던 '설탕과 권력' (시드니 민츠) '의자' (갤런 크렌츠) '연필' (헨리 페트로스키) 등이 그 구체적인 흔적들. 이들 작품의 저자는 누구도 아날리스트를 표방하고 있진 않지만 각기 일상의 사물을 통해 역사와 인류의 삶에 대해 접근하고 있는 점에서 지극히 아날학적이다.

앞으로 나올 '소금과 문명' (샘 애드셰이드) '손의 진화' (존 나피에르) 도 같은 선상의 출판물. 이대 신방과 출신으로 대기업.케이블TV 등에서 근무한 이력을 가진 이학사 주간 오영나 (31) 씨는 96년부터 출판계에 뛰어들었다.

그간 아날학에 대해 꾸준히 천착한 결과물로 '돈과 구원' (자크 르 고프) '나무의 신화' (자크 브로스) 를 낸데 이어 독특한 아날학의 관점에서 쓴 '중세의 밤' '중세의 즐거움' (장 베르동) , 그리고 '가족의 역사' (앙드레 바르기게르) 를 출간준비 중이다.

이들은 한결 같이 기존의 통사적.실증적 정통역사 방법론보다는 아날적인 매력에 빠져 있는 당사자들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여건은 초보적인 수준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보수적인 우리 사학계의 풍토와 여전히 일천한 우리의 아날학 뿌리를 감안하면 단기간내 분위기 조성은 불가능해 보인다" 는 입장이다. 그러나 대개는 자신들의 번역서 출간작업에 대해 "아날학 시각 및 분석기법 도입.확산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 으로 보고 있다.

이 와중에서도 현실문화연구 김수기 (39) 대표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미술평론가로서 갤러리아미술관 관장을 지냈던 그는 92년말 동시대의 문화에 대한 아날적 접근을 시도했다.

'압구정동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를 첫 작품으로 한 현실문화연구는 TV.광고.신세대.결혼.섹스.포르노 등을 키워드로 문화읽기를 순차적으로 시도했다.

여기다가 최근 선을 보인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 (김진송 지음) 는 아날학적 접근법의 확산가능성을 점치게 한다. 김 사장의 견해. "이 책에서 시도한 1920~30년대의 일상성을 우리 근대성의 태동과 관련을 시키고자 한 것은 상당한 의의를 가진다. 실제로 지금 수없이 난무하고 있는 광고전단과 포스터도 누군가 챙기지 않으면 곧바로 소멸해버린다는 관점에서 동시대 아날의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 이처럼 아날학에선 자료가 핵심이다.

*** '구조'중심의 역사학 한국은 시작단계

아날학은 1929년 프랑스 뤼시앵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에 의해 창간된 '사회경제사연보' 를 시초로 한다.

이는 정치.지도자.연대 중시의 정통역사학에 대한 반발로 사회.집단.구조 중심의 역사시각을 강조한 것이다. 이를 1세대로 한 프랑스의 아날학은 2세대 대표주자 페르낭 브로델에 의해 사회과학과 역사학의 접목으로 이어졌고 이어 3세대 조르주 뒤비에 의해 집단심성이, 4세대 로제 샤르티에에 의해 문화현상까지 각각 아날학의 범주에 포함됐다.

우리의 아날학은 프랑스의 제4세대 아날학, 즉 문화현상에 대한 접근부터 이뤄질 공산이 높은 상태. 이는 2세대 아날학의 교과서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번역서로는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브로델 지음.까치.1995년)가 고작일 정도로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허의도.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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