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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배 불빛이 보여요” 기다리던 가족들 환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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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선장 박광선씨(오른쪽)와 선원 이태열·김영길·김복만씨(왼쪽부터) 등 한 달 동안 북한에 나포됐던 ‘800연안호’ 선원들이 30일 저녁 속초항 해경 부두에 도착한 뒤 마중 나온 가족과 동료 선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속초=최정동 기자


“정부와 관계 기관단체,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빨리 돌아오게끔 성원해줘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30일 오후 8시27분 속초항의 해경부두. 선원 3명과 함께 동해상에서 오징어를 낚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고장으로 북방한계선(NLL)을 넘었다 북한 측에 나포된 뒤 한 달 만에 귀항한 연안호 선장 박광선(54)씨는 선원들과 나란히 선 채 국민에게 인사했다. 기관사 김영길(54)씨와 선원 이태열(52)·김복만(54)씨 등 선원들은 모두 담담한 모습이었지만, 무사 귀환한 안도감과 가족을 만날 기대감 때문인지 때론 상기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박 선장은 NLL을 넘어간 동기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관계 조사기관에 충분히 말하겠다”며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27일 밤 꿈에 남편이 나타났고 목소리도 들어 기대를 많이 했다”는 박씨의 부인 이아나(49)씨 등 선원의 가족들은 연안호 도착 40여 분 전에 다른 곳에서 선원들을 만나기 위해 항구를 떠났다. 한 달 동안 생사를 모른 채 남편을 기다리던 부인들의 눈시울은 붉었다.

북측, 오후 5시 NLL서 인계
이날 오후 5시 고성군 저진 북동방 16마일 지점 NLL에서 북측으로부터 해경 경비정에 인계된 연안호가 경비정의 호위를 받으며 속초항으로 떠난 지 두 시간이 지난 7시15분. 해양경찰서 옥상에서 어두컴컴한 바다 저편을 응시하던 박 선장의 아내 이아나씨가 소리쳤다. “불빛이 보여요. 우리 배가 분명해요.” 파도가 높아 예정된 도착 시간 8시를 훌쩍 넘길 거라던 우려를 덜어 주는 이씨의 말에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연안호의 귀환을 지켜보려는 이웃 주민과 동료 선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앞서 속초해경 등 관계기관으로 이뤄진 조사단은 연안호가 우리 측 NLL을 넘어온 뒤 선원들의 건강과 선박의 이상 여부를 선상에서 1차로 확인했으며, 선원들의 건강은 크게 문제가 없다고 해경 관계자는 밝혔다. 북한이 연안호 송환을 약속했지만, 우리 측은 해군 초계함과 고속정 3~4척을 NLL 인근까지 북상시켜 만일의 상황에 대비했다. 별 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연안호는 그동안 북측 장전항에서 억류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억류 문제 모두 해결돼

연안호 석방으로 우리 국민의 북한 억류 문제는 모두 해결됐다. 올 4월 장거리 로켓 발사, 5월 2차 핵실험, 개성공단 통행 제한 조치로 대미·대남 도발지수를 높여오던 북한의 대외 행보가 급변한 뒤 취해 오던 8월 유화공세의 대미 격이다. 북한은 지난 4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영접하고 억류했던 미국 여기자 2명을 석방했다. 이어 북한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초청했다. 13일 136일간 억류해온 개성공단의 현대아산 직원 유성진씨도 석방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엔 김 위원장의 최측근 실세로 구성된 특사 조문단을 남한에 보낸 뒤 남북관계 개선과 관련된 유화 메시지를 쏟아냈다. 28일 준당국인 남북 적십자사가 1년6개월 만에 만나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타결한 직후 북한은 연안호 석방 방침을 남측에 통보했다. 대북 전문가들은 남한 국민의 대북 여론 제고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지난해 금강산에서 발생한 박왕자씨 피살 사건 이후 북한의 일방적 행동으로 빚어진 비정상적인 남북 관계가 정상적인 과정으로 복원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북한의 유화공세는 전방위적이다. 북한 외교관을 한국의 재외공관에 보내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을 조문하는가 하면, 북한 측 매체를 활용해 유화적 분위기도 조성하고 있다. 북한의 입장을 대외적으로 대변해온 재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28일 “북한 언론매체들이 남조선에 대해 ‘역적패당’ 등의 표현으로 이명박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해 오다 조문단이 다녀간 이후 단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변화가 감지된다”고 보도했다. 이 대통령과 남한 정부를 원색적으로 비난해 온 북한 매체들이 북한 조문단의 이 대통령 예방 이후 비난 수위를 낮췄는데도 남한 언론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자 여론을 환기시키는 메시지까지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신문은 또 “현정은 회장의 김정일 위원장 면담과 북한 특사 조문단의 방남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며 “정부 차원에서도 상대가 내밀었던 손을 맞잡아야 전반적인 북남 관계가 발전의 궤도에 들어설 수 있다”고 보도했다.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 등에 대한 남한 정부의 적극 대응을 우회적으로 촉구하는 메시지다.

이 대통령, 김정일 건강 언급도
정부가 북한의 잇따른 유화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신중하면서도 다소 소극적인 대응을 하고 있는 건 북한의 화해 제스처가 남한의 여론을 분열하고, 북핵 문제를 비켜나가 제재 국면을 모면하려는 ‘평화공세’의 성격이 강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핵 문제는 그대로 두고 경제협력만 하는 모양새로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이참에 ‘정상적인 남북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도 강하다. 남북이 북한 조문단의 이 대통령 예방문제를 놓고 기싸움을 할 때도, 통일부는 예방 문제를 북측에 제안하자고 했지만 청와대는 “예방하라는 ‘미션’을 받고 왔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예방하려 할 것이고, 예방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면 우리가 ‘호소’한다 해도 되지 않을 것”이라며 북측이 먼저 제안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연안호 석방을 둘러싸고 조문단과 펼친 기싸움도 같은 맥락이다. 김기남 노동당 비서는 현인택 통일부 장관과 이 대통령 예방 문제를 조율하면서 “대통령이 우리를 면담한 자리에서 연안호 석방을 우리 측에 요청해 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했다 한다. 정부는 “연안호 석방은 우리가 요청할 문제가 아니고, 북측이 당연히 풀어 줘야 할 사안”이라고 대응했다. 예방이 끝날 때까지 조문단 일행이 이 문제를 두고 초조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관계자는 “예전처럼 우리 정부가 뭔가를 호소하고 김 위원장이 은덕을 베푸는 모양새를 취하고 싶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NLL을 넘어온 북한 선박을 하루 이틀 사이 또는 현장에서 북측으로 곧바로 송환(최근 5년간 22회)했으며, 북한도 2005, 2006년 월선한 남한 선박을 조기에 송환했다. 87년 이후 선박이 납북된 사례는 없었다.

이 관계자는 “조문단을 면담하는 자리에서도 이 대통령은 연안호 문제를 끝까지 언급하지 않았다”며 “대신 북한이 남북 대화의 금기로 선을 그어온 핵 문제와 김 위원장의 건강 문제를 언급했다”고 전했다. 이 대통령이 김 비서에게 “최근 TV를 보니, 김 위원장의 건강이 좋아지신 것 같다”며 안부를 물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비핵화 말도 안 꺼내
북한은 클린턴 전 대통령을 초청했을 때도, 이 대통령을 예방해서도 “북한의 핵무장은 미국의 적대시정책 때문”이라는 기존 입장만 반복할 뿐 ‘비핵화 의지’는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정부 당국자는 “중국을 통해 미국 측에 보내는 메시지 역시 ‘핵보유국 지위에 기반한 새로운 협상판’을 의미하는 언급만 하고, 6자회담엔 절대로 복귀하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밝혔다. 현 장관은 최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비공개 보고에서 “북한의 유화공세가 더 큰 벼랑 끝 전술을 펴기 위한 전략적 옵션일 수도 있다”고 보고했다. 핵 문제에 정통한 고위 관계자는 “북한이 과거 보여주기도 했던, 남북관계와 북핵의 순환 사이클, 즉 선(善)순환의 에너지는 표출하지 않고 있다”며 “미 정부도 북한이 어떤 유화 제스처를 보이더라도 비핵화와 관련한 행보를 보이지 않는 한 북·미 양자 대화는 어렵다는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이 당국자는 다음 주 한국과 중국·일본을 방문하는 보즈워스 대표가 곧 북한을 방북할 것이란 전망이 일각에서 나오지만, 북한이 6자회담 복귀를 약속하거나 영변 핵시설의 사용후 연료봉 재처리를 중단하는 등 비핵화의 길로 돌아오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보즈워스 대표의 방북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 양국은 2006년 1차 핵실험 후 북한이 대화에 복귀하는 것에 맞춰 유엔의 대북 안보리 제재를 유야무야 해제한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핵협상이 재개되더라도 핵 문제가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룰 때까진 제재를 지속하겠다는 방침이다. 워싱턴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북한이 두 차례나 핵실험을 한 대가는 크다”고 말했다.

김수정·속초=이상재 기자 su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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