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혁명 20주년]호메이니에게 신세대들은 등돌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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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선 축제가 한창이다.

1일부터 시작된 혁명 20주년 기념행사다.

헬리콥터들은 10년 전 사망한 아야툴라 호메이니의 무덤 위에 꽃을 뿌렸다.

그러나 정작 국민은 관심이 없다.

이란의 각급 학교는 오전 9시33분을 기해 일제히 종을 쳤다.

20년 전 시아파 이슬람교도의 최고지도자인 호메이니가 15년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입국한 시간이다.

하지만 종소리의 의미를 아는 학생들은 별로 많지 않다.

국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젊은 세대의 관심사는 혁명정신이 아니다.

경제와 서구문화다.

이들은 축구열기에 휩싸여 있다.

상영이 금지된 영화 '타이타닉' 의 해적판 비디오를 몰래 보기도 한다.

여학생들도 차도르 밑에 트레이닝복을 입기 시작했다.

이들의 방에 걸려 있는 것도 호메이니의 초상화가 아니다.

알리 다에이 등 이란 축구 스타의 포스터들이다.

20년 전 이란 전역을 휩쓸며 팔레비왕을 내쫓고 공화제를 탄생시킨 혁명정신이 점차 퇴색하고 있다.

무엇보다 국민의 생활수준이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9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는 더욱 비틀거리고 있다.

이란 외화수입의 90%를 점하는 석유 가격이 폭락해 지난해 국가수입은 30% 이상 감소했다.

실업률을 계속 높아져 가고 2백10억달러에 이르는 대외채무도 늘어만 간다.

리알화의 가치는 최근 10% 가량 폭락했다.

현재 이란 국민이 믿고 있는 경제재건의 지름길은 미국과의 관계회복이다.

단교는 79년 테헤란 주재 미대사관 점거사건 이후 지속되고 있다.

미국 기업이 돌아오면 석유 개발에도 탄력이 붙고 유럽.일본 기업의 투자도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이다.

잘 알려진대로 그는 개혁파다.

동시에 그는 친미파다.

2천만명의 젊은이들과 여성들은 지난 97년 대통령 선거에서 하타미에게 표를 던진 바 있다.

이란에 변화와 경제재건을 가져다줄 유일한 대안이라고 판단한 때문이다.

하타미 대통령은 CNN 방송과 유엔 연설을 통해 미국과의 대화를 요청하고 스포츠 교류도 일부 시작했다.

그러나 개혁에 대한 저항세력은 아직도 막강하다.

이란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율법국가다.

헌법상 최고지도자로 경찰.군대.사법권을 갖고 있는 알리 하메네이를 정점으로 하는 이란 보수파는 미국을 여전히 '악마' 로 규정하고 있다.

하메네이의 추종자 라프산자니 전대통령은 "위대한 군대의 힘이 없었다면 미국은 이란을 한 입에 삼켰을 것" 이라며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다수 포진한 군부에 대미 성전 (聖戰) 의 투지를 불어넣고 있다.

이들은 의회도 장악하고 있다.

심지어 지난해 말부터 빈발하는 예술인이나 반체제 정치인들의 암살 배후엔 보수파가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현지 외교가는 "젊은이들에게 영향력이 있는 개혁파 예술인들을 보수강경파가 폭력으로 탄압한 결과" 라 보고 있다.

개혁파와 보수파가 치열한 권력투쟁 속에 혁명 20주년을 맞은 이란은 이렇게 진통하고 있다.

정현목 기자

◇호메이니는…

지난 79년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끈 이란혁명은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구체제인 팔레비 왕조를 전복시킨 이슬람 혁명가다.

'이슬람의 정체성 회복' 을 내건 시아파 무슬림의 아야투 (최고 성직자) 였던 호메이니는 혁명으로 코란과 이슬람 율법에 의거, 정치적 권리를 신탁받은 파키 (이슬람 법학자) 와 울라마 (성직자) 들이 직접 국가를 통치하는 중세적 신정 (神政) 체제를 부활시켰다.

호메이니는 78년 9월 8일 계엄령 속에 시민 수천명이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 '검은 금요일' 이후 혁명의 지도자로 부상, 지난 89년 사망 때까지 10년간 이란을 통치했다.

김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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