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이 아니라 ‘정직’을 파는 가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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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여 전 문 연 천안 신방동의 베이커리 ‘몽상가인’. 권혁진 사장이 설탕공예로 공룡 형상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2005년 전국 대회서 대상을 탔다. [사진=조영회 기자]

“몽상가인? 웬 빵집 이름이 저럴까?”

천안 신방동에 서울 강남풍의 아담한 테라스를 지닌 베이커리가 등장했다. 성지새말2차 아파트와 상가건물 사잇길에 정문이 있어 찾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문을 연지 한 달여 만에 그집 빵맛은 이미 주민들 사이 소문이 났다. 이 빵집은 유화제와 개량제 등 화학 첨가제를 절대 쓰지 않는다. 유화제는 빵의 수분을 유지하게 하는 첨가물이고 개량제는 단기간에 많은 빵을 발효시키는 합성 첨가물이다. 인체에 이롭지 않아 하루 섭취량 제한 기준이 있다.

‘몽상가인’의 테라스가 늦여름 산뜻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권혁진 사장이 직접 설계해서 꾸몄다고 한다. [사진=조영회 기자]


“먹는 장사이니만큼 ‘정직’을 최고의 모토로 삼고 빵을 만들고 있다”는 사장 권혁진(35)씨. 빵집 이름에 몽상가(夢想家)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걸까? 권씨는 “몽상가는 헛된 꿈을 꾸는 사람을 말하지만, 나는 빵 만드는 일도 창의적인 꿈을 계속 펼치면 언젠가 예술적 경지에 오를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빵 예술가가 되려는 그 ‘몽상’을 굳히고자 상호 끝에 도장 ‘인(印)’자를 붙였다. 그는 28살 때인 2002년 제빵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늦게 빵을 배운 것은 어렸을 때부터 빵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제빵 기술을 배웠고 3개월 만에 제빵·제과자격증을 땄다. 문득 자신감이 생겨 직장을 그만뒀다. 그러나 처음 들어간 평택의 한 베이커리에서 3일 만에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제빵 기술과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제빵기술 터득의 ‘유랑길’에 올랐다. 8년간 빵을 잘 만드는 ‘고수’들을 수소문해 서울·일산 등지로 찾아 다녔다. 그동안 천안의 가족(아내와 두 자녀)들과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브랜드 빵을 이기는 길=“대형 브랜드 빵을 누르는 토착 브랜드를 만들어 내겠다.” 정직과 열정으로 승부낼 작정이다. “내 자식에게 먹이고 싶지 않은 것을 고객에 내놓을 순 없다”는 신념으로 화학첨가제를 일절 쓰지 않는다.

그의 가게에는 제빵사가 3명 더 있다. 권씨 자신을 셰프라고 부르게 하고 그들은 스텝이라 부른다. 제빵실은 연구실로 통한다. 스스로의 제품에 긍지를 갖기 위해서다. 권씨는 최근까지 서울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의 유명 베이커리 ‘쿠키모리’에서 일했다. 이 가게에는 연예인들 기념일 케이크 주문이 많은 곳이다. 동료들과 함께 심은하씨 아기 돌, 이휘향·노사연씨 가족 행사를 위해 케이크를 만들었다. 패셔니스타 패리스 힐튼의 방한 기념행사때 공주풍의 컨셉트 케이크를 만들기도 했다. 영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의 소품으로 권씨의 케이크가 나오기도 한다.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촬영 종(終)파티 케이크도 만들었다.

‘쑥덕쑥덕’등 몽상가인의 빵은 유화제·개량제를 쓰지 않는다.

몽상가인 빵 맛은 어떨까. 재미있는 이름에 눈길이 갔다. ‘쑥덕쑥덕’. 찹쌀 반죽할 때 쑥을 넣고 빵 속에 들어가는 떡에도 쑥이 들어간다. 파운드 케이크가 별미다. 오렌지를 3일간 끓이고 절여, 코코아가루를 넣어 만든 ‘쇼콜라오렌지 파운드 케이크’, 건과류와 과일을 적절히 배합한 ‘너츠후르츠 케이크’ 등.

몽상가인의 케이크는 작다. 권씨는 “대부분 가정에서 큰 케이크를 사서 한 번에 다 먹지 못하고 냉장고에 보관한다. 그러나 케이크은 금세 먹지 않으면 맛이 떨어져 버리기 십상이다.” 몽상가인이 판매가 1만6000~1만9000원의 작은 케이크만 파는 이유다.

◆설탕공예의 길=빵을 배우면서 유리처럼 투명하고 얼음처럼 빛나는 설탕공예에 매료됐다. 마땅히 배울 데를 찾지못해 유학까지 생각하다가 서울 삼성동 ‘정영택아트스쿨’을 찾아냈다. 5개월간 피땀 흘리며 배웠다. 설탕으로 다양한 형태를 만들고, 색상도 자유롭게 입힐 수 있다. 유리처럼, 도자기처럼 질감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다. 색깔 입히기의 전문성을 위해 미술학원까지 다녔다. 그 결과 입문 첫 해인 2005년 코엑스에서 열린 제12회 서울 국제빵·과자경진대회에서 ‘악어와 꽃’으로 대상을 탔다. 악어의 그로테스크함과 꽃의 아름다움이 강렬한 대비를 이뤄 깊은 인상을 줬다는 평이다. 980명이 참가, 설탕공예뿐아니라 빵·과자·초콜릿 부문에서 1등을 뽑고, 전 분야 통틀어 한 명만 주는 최고상을 차지한 것이다.

◆‘인간극장’ 취재 거절=그는 10년 전 다니던 직장에서 사고를 당해 오른팔이 의수인 장애인이다. 그렇지만 빵을 만드는 데는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 설탕공예로 대상을 탔을 때 두 방송사로부터 동시에 ‘인간극장’ ‘성공시대’를 찍자는 섭외가 들어왔다. 그러나 실력보다 자신의 장애에 촛점이 맞춰졌다는 생각이 들어 모두 거절했다. 지난해 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 도 예선을 거쳐 전국 1등을 수상했다. 설탕공예는 힘든 창작 작업이다. 한 작품을 만드는 데 7~9시간이 꼬박 걸린다. 몽상가인 (041)575-1225.

조한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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