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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화해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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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한데 이런 선수가 첫 전지훈련에서 우연히 허정무 감독의 눈에 들어 시드니 올림픽 대표가 된다. 박지성은 세상이 하얘질 정도로 감동했지만 곧 수많은 잡음과 소문, 야유에 시달린다. 명지대의 김희태 감독과 허정무 감독이 자주 바둑을 두었기 때문에 ‘바둑으로 잉태된 대표 선수’라는 소문마저 나돌았다.

처음엔 바둑 얘기에 솔깃하여 열심히 TV를 봤다. MBC 스페셜 ‘박지성을 아는가’ 편이었다. 그러다 점점 빠져들었다.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눈물과 끝없는 위기(그는 무릎에 일곱 군데 구멍이 났고 세 번 수술을 받았다)에 놀랐고 이를 불평 없이 이겨낸 강인함에 놀랐다. 월드컵 때도 그는 대표팀에서 퇴출돼야 할 1순위로 지목됐으나 “섭섭했지만 억울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학연도 계파도 없었지만 그는 항시 세상과 화해하는 마음이었고 그래서인지 운도 따랐다. 이번엔 히딩크라는 이방의 구원자가 그를 살려냈고 그 후의 반전이야 세상이 다 아는 얘기다. 볼수록 흐뭇한 스토리였다.

일요일, 집에서 또 TV를 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 실황이 장엄하게 펼쳐지고 있다. 엄숙한 목소리가 서거를 아쉬워하며 생전의 업적을 열거한다. 온갖 고초를 딛고 민주화를 이뤘으며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단기간에 극복했으며 남북 협력의 시대를 열었으며 그 업적으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관된 신념의 강인한 여정,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찬양했다.

박지성처럼 환한 스토리 뒤에도 그 많은 눈물이 있었는데 DJ의 뒤안길은 말해서 무엇할까. 식장에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앉아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눈길을 끈다. 이승의 악연을 이미 털었음인지 사뭇 편안한 모습이다. DJ의 국장을 허용하면 국민이 봉기할 것이라며 반대한 사람도 있었다지만 정부가 국장을 받아들인 것은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험난한 역사를 겪으며 우리는 끊임없이 편이 갈렸고 드디어 양 극단에 선 사람들의 목소리만이 공허하게 허공을 갈랐다. DJ는 편이 갈리는 하나의 기준이었고, DJ를 향한 그 마음들은 ‘신념’으로 굳어갔다. 토마스 길로비치라는 사회심리학자의 말대로 강렬한 선입관 때문에 똑같은 사실을 목도하고도 자신의 오래된 신념에 맞게 주물러서 정반대로 생각하게 됐다. 편향성은 더욱 양극화됐다.

TV로 눈을 돌리니 영구 행렬은 이제 슬퍼하는 인파를 뒤로하고 국립묘지로 향하고 있다. 파란만장이었고 질풍노도의 삶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긴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가 운구 차량을 편안하게 감싸고 있는 듯 보인다. 느릿한 행렬이 부드러운 바람이 돼 우리 마음속의 칼들을 어루만지는 듯 보인다. 화합이라는 높은 목표까지는 몰라도 편을 가르고자 안달하는 사람들마저 잠시 쉬게 하는 듯 보인다. 죽음은 산 자를 위한 신의 위대한 설계인가.

박치문 바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