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보석’흑진주가 남태평양서 영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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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의 도서국가인 마이크로네시아 연방국의 축(Chuuk)주 바다는 유리알처럼 맑다. 그 속에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기 어려운 흑진주 조개가 살고 있다.

한국해양연구원 박흥식(사진) 박사 팀이 처음으로 만든 ‘불임(不姙) 흑진주 조개’다. 품질 좋은 흑진주를 생산해 내기 위해 개발한 것이다. 알집 속에 알이 들어 있으면 그 속에 함께 들어 있는 진주의 표면이 고르지 못하게 되는 등 품질이 낮아지는 문제를 극복하려는 전략이다.

현재 불임 흑진주 조개들은 알집은 있으나 그 속에는 알 대신 흑진주 핵만을 품고 자라고 있다. 그러면서 이물질인 핵이 들어와 느끼는 아픔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핵 위에 분비물을 덮고 또 덮어 가고 있다. 핵의 표면을 매끄럽게 하려는 것이다. 탄산칼슘을 주성분으로 하는 분비물 층이 수천 겹 이상이어야 하나의 양식 진주가 탄생한다. 흑진주 양식은 1970년대 일본에서 처음 성공했다. 그 이후 30여 년이 지나 한국해양연구원이 뒤늦게 뛰어들면서 획기적인 신기술을 잇따라 내놓아 세계 흑진주 양식업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① 태어난 지 15일 된 흑진주 종패. 바다를 떠돌다 어느 정도 크면 바위 등에 달라붙을 수 있는 족사를 뻗어 정착한다. 기존 양식장은 근친 교배로 종패의 품질이 나빠지고 있다.

② 흑진주 조개를 청정 바다의 줄에 매달아 키운다. 해적 어류를 피하기 위해 그물망에 넣기도 한다.

③ 진주의 핵. 미국에서 나는 민물 섭조개의 껍질로 만든다. 일본에서 주로 가공한다. 핵 위에 수천 겹의 진주층이 쌓여야 하나의 진주가 완성된다. 핵 위의 진주 층은 1~2mm다.

④ 흑진주의 분비물을 생성하는 외투막의 살점 조각. 이것이 흑진주의 색을 결정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색을 내는 부위를 잘 골라야 한다. 잘게 자른 외투막 살을 핵과 함께 알집에 넣어준다.

⑤ 흑진주 조개가 15~20㎝로 컸을 때 핵을 삽입한다. 흰색이 핵이다. 큰 진주를 생산하려면 두어 번에 걸쳐 알집의 크기를 점차 키우면서 더 큰 핵을 넣어야 한다.

⑥ 핵 이식 후 2~3년에 수확한 흑진주. 흑진주의 가격은 시장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지름 16mm는 개당 200달러, 18mm는 300달러 정도 한다. 알이 클수록 비싸다.


흑진주 양식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 기술은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는 ‘일급 비밀’이었다. 박 박사팀은 기술 개발에 처음 나선 후 9년 여 동안 ▶불임 조개 개발 ▶산란 조절 ▶종패 대량 생산 ▶생산기간 24개월에서 19개월로 단축 등의 신기술을 개발해 냈다.

지난해에는 지름 8.5~9.5㎜의 흑진주를 처음으로 수확하는 기쁨도 맛봤다. 현재 일부 조개에는 지름 12㎜짜리 핵을 집어넣어 놨기 때문에 지름 14~15㎜의 흑진주를 올해 안에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흑진주는 매혹적인 검푸른 색으로 여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보석.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 제대로 개발되지 않고 있는 데다 양식 바다가 오염되면서 갈수록 고급 흑진주 양식은 어려워지고 있는 상태다.

박 박사는 “그동안 실험용으로 잡은 흑진주조개만 서너 트럭이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0년 처음 기술 개발에 나선 이후 3년 동안 마이크로네시아 해안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흑진주 생산에는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프로젝트마저 중단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 이후 연구비를 구걸하다시피 해 조개와 싸웠다.

이 과정에서 커다란 흑진주를 생산하는 방법도 터득하고 신기술도 대거 개발할 수 있었다. 흑진주조개의 생리를 조절하기 위해 얼음물을 사용하는 노하우도 쌓았다.

흑진주조개는 알집에 처음부터 큰 핵을 집어 넣으면 죽고 만다. 처음에는 5㎜ 내외의 작은 것부터 시작해 한 번 수확한 뒤 조개를 살려 더 큰 핵을 집어 넣는 것이다. 알집을 점차 키워가는 방식이다. 흑진주 조개의 수명은 15년 내외이므로 서너 번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수확할 때마다 조개를 살려 재활용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흑진주를 생산할 수 있는 조개는 한 종밖에 없다. 남태평양의 따뜻한 바다나 일본 남서제도, 이란 해역 등에서 서식한다. 흑진주의 90% 이상은 남태평양의 타히티에서 생산된다.

그러나 타히티는 오랜 양식으로 바다가 오염됐고, 조개들의 근친교배로 종패의 품질이 급속하게 나빠지고 있다.

박 박사는 “그동안 개발한 기술을 활용하면 마이크로네시아를 기반으로 한 한국의 흑진주 양식이 세계 시장에 돌풍을 일으킬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흑진주 양식을 원하는 업체와 마이크로네시아 정부에 기술 전수를 준비 중이다. 앞으로 한국 기술로 생산한 흑진주 목걸이를 세계 여성들이 걸고 다닐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 박 박사의 생각이다.

글=박방주 과학전문기자
사진=김도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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