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신춘 중앙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소인국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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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어머니는 때때로 내 삶에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둘렀다. 도무지 말릴 수 없는 어머니의 식탐이 내게 식사의 강요로 돌아올 때가 바로 그러했다.

어릴 적 그 푸른빛의 라면을 먹으려다가 구타당한 기억 때문에 나는 항상 음식 앞에서 주눅이 들었고 더욱이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는 도통 먹지를 못했다. 음식을 삼키는 순간마다 어머니의 매운 주먹이 날아들 것 같아 바로바로 입엣것들을 뱉어내곤 했던 것이다.

그런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어머니는 어떻게든 내게 뭘 먹이려고 했지만 으레 반나절씩이나 걸려서 만든 갖가지 음식들은 번번이 어머니의 차지였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몹시 화가 나서 두부소박이와 북어찜 그리고 시금치를 한 입 가득 우물거리며 방백을 하는 연기자처럼 중얼거렸다.

쟤가 똑 당신을 닮았다니까, 안 그래? 곧 죽어도 지 고집대로야. 아주 꼴도 보기 싫어 죽겠어. 어쩌면 그렇게도 내 뜻대로 되는 사람들이 아니냐. 둘 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문득 어머니의 속에 꼭 누군가가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이는 아주 착한 사람이거나 일찌감치 수족이 마비되어 가만히 누워만 있는 사람일 터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하는 온갖 독설을 다 들어주고 어머니가 무엇을 얼마나 먹건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가 보았다.

어쩌면 그이는 언젠가 어머니로부터 압사 당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식탐은 날이 갈수록 집요해져서 차라리 괴로워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그렇게 오년이 지났다. 누구를 미워하다가 지치게 되면 그 사람이 되게 늙는 모양이다. 어머니는 해묵은 마당의 늙은 안주인처럼 홀로 앉아 언젠가 오기로 한 손님이나 맥없이 기다리는 듯싶었다.

이 늙은 여주인은 화투로 하루의 운을 점쳐보곤 했는데 '우산을 든 손님' 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날도 그가 오지 않을 모양이라고 심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쩌면 한참 후에나 올 그 '손님' 이 어머니의 애간장을 다 녹이고 대신 단풍 같은 '근심' 만 어머니의 마음을 울긋불긋하게 어지럽혀 놓는 것 같았다.

탁, 탁, 탁. 기어이 '손님' 의 멱살이라도 잡아끌고 오려는 듯 집요하게 화투를 쳐대는 어머니 때문에 나는 밤마다 두통에 시달렸다.

그 소리는 선명했던 내 기억을 함부로 뭉개 버려서 나는 역사를 잃은 식민지의 후예처럼 앓았던 것이다. 나는 그때마다 아버지가 몹시 그리웠다. "나중에야 안 거지만 엄만 맨날 무얼 되게 기다린 것 같아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긴긴 담장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서 살구나뭇가지에 달이 걸릴 때까지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 같은 거요. 엄마는 '손님' 이 떨어지는 날이면 밤새 거실에 앉아 있곤 했거든요. "

그렇구나……. 그녀는 한숨처럼 그런 말을 내뱉었고, 나는 막연히 무엇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밖에다가 시선을 던져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막 지나가는 버스에서 낯익은 듯한 웬 사내를 보고 후닥닥 밖으로 나가보았으나 버스는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잃고 간밤에 떼어본 오늘의 운세를 떠올려 보았다. '님' 에게서 '소식' 이 오지만 '근심' 이 생긴다고 했던가? 그때부터 나는 행여나 하는 그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다시 그녀에게로 말을 건넸다.

"참 이상하죠? 낯선 남자가 자꾸 내 앞으로 음식을 밀어 놓는 거예요. 아까도 말했지만 난 뭘 잘 먹지 못하거든요. 겨우 젓가락질만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아주 엄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거예요. 다 먹지 않으면 집에 보내 주지 않을 것처럼 말이죠. " "……. " "난 이미 냄새부터 질린 상태였지만 그가 아버지처럼 보고 있는 통에 도리가 없었어요. " 그녀가 이맛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알려나? 어떤 음식이든 혀에 닿기만 하면 속에서 이만한 게 넘어와요. 보이진 않지만 그건 틀림없이 사람 주먹이구요. 먹기만 해봐라 하는 것 같단 말이에요. 그때도 그랬어요. 그래서 나는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가 신물이 나올 때까지 토해냈죠. 한참만에 나와 보니 그 사람이 내 가방을 들고 서 있더군요. 설마 다시 돌아가 술맛까지 잃게 할 거냐면서요. " 그녀는 한참만에 입을 열고 피식 웃으며 그 사람 참 엉뚱하군요, 했다.

나는 그에 대한 이야기로 뒤를 이었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쉽게 생각나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명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문을 여는 순간 소슬한 바람 한 점이 뒷모습을 보이며 저만치 물러가고 있었다.

남도의 어딘가에서는 소리 없이 배꽃이 하얗게 지고 그 배밭길을 지나는 낯선 남녀가 슬그머니 어떤 인연이라도 맺을 것 같은 깊은 봄밤이었다. 밖으로 나온 그 '엉뚱한 이' 는 어디 갈 데라도 있는 사람처럼 주저하지 않고 내 앞을 질러 갔다. 나는 막상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가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아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대는 누굴까, 누굴까. 성큼성큼 일렁이는 그의 그림자를 밟으며 중얼거리다가 숨이 차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움직일 때마다 흰 달빛에 드러나는 쓸쓸한 그의 등이 파랗게 굽어 있었던 것이다.

그 때 그 푸른빛이라니……! 아주 짧은 순간, 아련한 얼굴 하나가 총총히 지나쳐 갔다.

가까운 데에서 초록색 이파리들이 어지럽게 몸을 뒤채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오래 발소리가 멎어 있자 한참만에 그가 다그쳤다. 나는 그 얼굴을 기억해 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겨우 늪에서 빠져나온 듯 허청걸음으로 다가가 그의 손에 내 손을 슬쩍 밀어 넣었다.

"저런! 당신이 먼저 손을 잡았군요. 하긴 그렇게 배꽃이 하얗게 지는 밤길이었으니 있을 수도 있는 일이죠 뭐. " 이번에는 되레 내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마치 내 기억을 비집고 들어와 그 밤을 보는 듯 먼 풍경처럼 희미하게 웃다가 왜요, 하면서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는 그가 왜 나를 보았는지 또 기다렸는지 재우쳐 물었다. "웬 여자가 밥상머리에서 호되게 혼난 애처럼 미적거리고 있더라나요?" 그녀는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그는 웃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린 시절 그는 아랫목에 엎드려 숙제를 하다가 실수로 밥공기를 발로 건드린 적이 있는데 저녁을 먹은 지가 하도 오래 되고 마땅히 주전부리 할 것도 없어 몰래 그 밥을 먹다가 어머니에게 된통 혼이 났단다.

그 후로 밥상머리에서는 어머니가 뭐라지 않아도 괜히 주눅이 들었는데 내 모습이 꼭 그때의 자기 모습 같더라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는 동안 평생 기다려온 사람을 만난 것처럼 몹시 기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왠지 귀에 익은 듯싶던 그의 목소리는 세월에 부대껴 낡아버린 내 아버지의 목소리와 흡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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