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멸망론'실체 대해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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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천년 (밀레니엄) 단위로 연대를 나눠온 기독교 중심의 서양에서는 999년에 그랬듯이 1999년이 '종말의 해' 라는 이미지가 각인돼 있다.

특히 정통한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가 '멸망의 해' 로 예측했다는 설 (說) 까지 가세해 자칫 '멸망론 신드롬' 을 부를 수도 있다.

더구나 초단위의 스피드로 세계상이 변하고 앞날을 가리켜 줄 이념을 잃어버린 불투명성으로 인해 현대는 '말세' 에 대한 불안이 상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우리는 당장 짐을 꾸리고 지구의 종말에 대비해야 하는 걸까. '지구멸망론' 을 둘러싼 허상을 벗기고 그것이 희망의 또 다른 표현임을 이야기해 본다.

1999년 7월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앙골모아의 대왕을 부활시키기위해 그 전후 기간 마르스는 행복의 이름 하에 지배할 것이다.

'지구 종말론' 을 예언했다해서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의 4행시의 전문이다.

'7월' 의 몇일인지, '앙골모아' 나 '마르스' 의 정확한 뜻이나 맥락이 무엇인지, 그런 의문은 접어두어도 좋다.

중요한 건 앞의 예언시를 '진담' 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2000년이 도래하기 직전의 해가 '지구재앙의 해' 가 될 것으로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내년의 어느 때, 인류가 이제껏 축적했던 모든 것들은 일순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 버리고 인간은 완전히 파멸해 버린든지 혹은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새로운 시작' 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6세기 프랑스 남부지방에 살았던 문명비평가.예언가로 전해져오고 있다.

그를 옹호하는 이들은 프랑스 혁명의 발발을 비롯해 자동차나 비행기의 발명, 히틀러의 파시즘이나 2차대전의 도래 등을 노스트라다무스가 3백~4백년전에 이미 예견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1999년 지구종말론' 도 결코 과장이나 억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환경오염의 가속화, 3차 세계대전이나 핵전쟁의 발발 가능성, 혜성과 지구의 충돌설등이 '공포의 대왕' 의 '과학적인 근거' 가 아니냐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실 고어 (古語) 체의 프랑스어로 돼 있는 노스트라다무스의 4행시들에 담긴 예언들은 후대의 해석에 의한 것이다.

즉 역사적 사건들을 '설명' 하기위해 4행시에 담긴 자구 (字句) 를 퍼즐 풀 듯 사후적으로 꿰맞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보면 '지구 종말론' 은 그의 4행시를 '사건이 일어나기 전' 에 예언으로 적용하는 첫 케이스인 셈이다.

역술가들이 개인의 과거사를 꼭 집어낼 때 깜짝 놀라며 그들이 '점치는' 미래에 더 강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처럼,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둘러싼 해묵은 '소동' 도 그런 차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종말론' 은 기독교에서 파생되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시간을 순환적인 것이나 윤회로 이해했던 불교나 동양적 사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발상이다.

거기엔 '태초' 도 없고 '종말' 도 없었다.

반면 천지창조로부터 예수의 탄생과 부활 - 예수의 재림 - 천년왕국으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시간관을 가진 기독교에서는 종말론을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는 '구원의 시간' 으로 받아들였다.

'시한부 종말론' 이니 뭐니하며 광신도들이 집단 자살 같은 걸 시도하는 것은 그 '구원의 시간' 을 앞당기기 위한 허망한 시도 들이다.

김균진 (연세대 신학) 교수는 최근 펴낸 '종말론' (민음사)에서 "종말론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 을 넘어서서 '아직 주어지지 않은 것' 을 쟁취하려는 역사 발전을 위한 내적 동인" 이라고 정의했다.

종말론이란 특정한 연대에 발생하게끔 예정돼 있는 '사건' 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유토피아를 향한 갈망'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사이비 종말론' 이 창궐하는 배경에는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세계로부터 등을 돌린 삶의 태도" 가 깔려있다고 지적했다.

'힐체어 위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예언자의 유구한 전통은 불명료한 예언을 내리는 것" 이라고 했다.

모든 예언은 어느 방향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는 말이다.

예언은 믿는 자들의 몫이다.

그리고 현대로 올수록 그 배후에는 대중매체의 상업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미 출판이나 영화.가요등 대중문화에서 '세기말의 불안' '지구의 종말' 운운하면서 현대인의 '불안' 을 상품화하는 기획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노스트라다무스' 를 제목으로 단 책들도 서점에 벌써 여러 권 깔려있다.

하지만 노스트라다무스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스피노자의 너무나 잘 알려진 경구는 '지구종말론' 을 둘러싼 숱한 논쟁들이 얼마나 호들갑스럽고 무익한지를 일찌기 간파한 명언임에 틀림없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해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 .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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