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탈북자에겐 남한이 등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최근 중국 공안당국이 지린 (吉林) 성 퉁화 (通化) 시에서 대대적 단속을 벌여 탈북자 1백50여명 가량을 적발해 북한으로 강제송환한 사건이 국내외에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국내에서는 언론이 일제히 이 사실을 보도했고 국외에서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UNHCR) 이 사실여부 조사를 그들의 베이징 (北京) 사무소에 지시했다.

사실 중국 공안당국의 탈북자 단속 및 강제송환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일은 아니다.

중국측 문헌에도 1993~94년 2년 사이에 1백40명을 강제송환했다고 적시돼 있다.

그동안 몇몇 언론인이 이 사태를 중시하고 계속 추적해 왔는데 이번에 거의 모든 언론이 이 사건에 관심을 보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겠다.

아마 KBS - TV '일요스페셜' 프로에 방영된 북한 암시장의 암울한 광경, 특히 부모없는 아이들의 참상에서 자극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우리나라 언론이 재중 (在中) 탈북자의 강제송환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반갑고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AP통신이 이번 사건에 관심을 보여 지린성 공안당국으로부터 송환사실을 확인받는 동시에 중국측의 입장을 취재.보도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AP통신과 같은 세계적 통신사가 재중 탈북자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국제여론이 비등할 때 탈북자를 다루는 중국당국의 자세변화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UNHCR가 사실조사에 착수키로 한 것도 고무적인 사실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UNHCR 베이징사무소측과 접촉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재중 탈북자는 국제법상 난민 (難民) 이 아니고 불법입국자일 뿐이라는 중국당국의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스위스 제네바 소재 UNHCR 본부도 베이징사무소의 견해에 동조하고 있었다.

사정이 그랬었는데 이번에는 그들이 사실조사에 착수하겠다는 것이니 문제 개선에 희망을 걸어볼 만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 재중 탈북자가 과연 국제법상의 난민으로 인정받느냐 못받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이 법리 (法理) 논쟁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얻어내려면 국제법 학자들의 치밀한 논리전개가 필요하다.

아울러 탈북자들의 탈출동기와 북한의 현황 등에 대한 믿을 만한 실태조사가 실시돼야 할 것이다.

실태조사는 권위있는 국제 비정부기구 (NGO)에 의해 수행돼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1996년 9월 국제사면위원회가 간행한 '재러 북한 벌목공 및 탈북자 실태보고서' 와 같은 보고서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이 보고서가 간행된 후로 러시아당국은 UNHCR와 특별협정을 체결해 난민심사절차를 UNHCR측에 위임했고 그에 따라 이미 많은 탈북자가 난민으로 판정돼 한국으로 입국하고 있다.

재중 탈북자가 난민이냐 아니냐가 결정된 다음의 일이 되겠지만, UNHCR가 관리하는 난민수용소를 중국에 설치하는 문제도 지금부터 고려돼야 할 것이다.

굳이 UNHCR를 개입시키려는 것은 수용돼 있던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돌아갔을 때 당하는 불이익을 최소화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북한도 유엔 회원국인 이상 유엔이 관리하는 수용소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처벌하지는 못할 것 아닌가.

그러나 이것도 탈북자들을 위한 안전한 방책은 되지 못한다.

북한이 인권의 국제적 기준을 서슴없이 짓밟아 온 것을 생각할 때 한 가닥 우려가 없지도 않은 것이다.

재중 탈북자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문제에 임하는 우리 정부와 우리 국민의 마음가짐이라고 하겠다.

한민족의 종주국 (宗主國) 으로서 모든 재외 한인이 당하는 고통을 자기가 당하는 것처럼 아파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또 인내심을 가지고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지금 많은 탈북자들은 대한민국을 희망의 등대로 바라보고 있다.

최근 필자는 한 재중 탈북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받았다.

"기백만 서민이 굶주림으로 처참히 죽어가는 현실을 눈앞에서 목도하면서 나도 이 땅의 민중으로서 이제 이 죽음에 참여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내 삶이) 너무도 허무하고 의의없는 삶이었습니다.

(중략) 이제 인식을 굳히고 실력을 키워 우리 민족만이 당하는 수난에서 2천만 민중을 구출하는 일에 자신을 기꺼이 바치는 것이 간절한 소망일진대 이 소망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이라고는 우리 모두가 등대로 바라보는 대한민국에로의 귀순일 것입니다. 그것을 간절히 열망합니다. " 우리는 이 기대에 어떻게 부응해야 할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윤현 북한인권시민연합대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