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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림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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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테이프를 틀면 앞머리에 "옛날 어린이들에게는 호환(虎患).마마가 가장 무서웠지만 요즘은 불법 성인비디오로부터 어린이를 보호해야 합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호랑이가 마을에 출몰해 해를 입히고, 천연두(마마)로 많은 아이가 목숨을 잃던 시절을 빗댄 것이다. 서양 중세의 페스트(흑사병)나 매독.결핵.나병처럼 시대마다 집단적으로 공포를 느끼는 돌림병이 있다.

얼마 전 강도가 겁탈하려 하자 모기에 물린 자국을 보여주며 "에이즈에 걸려 어차피 죽을 목숨, 마음대로 하라"고 해 위기를 모면한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 여성의 침착성과 기지도 대단하지만 한편으론 에이즈가 우리 시대의 역병이란 걸 새삼 확인하게 된다.

돌림병은 치료제가 나오기 전에는 사람들을 극단적인 두려움으로 몰아 과잉 반응하거나 패닉(정신적 공황) 에 이르게까지 한다. 국내에서 에이즈 감염 환자가 처음 발견된 건 1985년이다. 이후 '에이즈에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는 잘못된 인식이 번지면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실제 감염이 안 됐는데도 "체중이 갑자기 줄었다" "고열과 식은땀이 난다" "반점이 여럿 생겼다"며 지레 겁먹고 자살한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전과 같은 막연한 공포심은 많이 수그러든 것 같다. 그러나 에이즈가 '몹쓸 병' 이라는 생각은 아직도 만연하다. 특히 동성애자들이 에이즈를 만들고 퍼뜨리는 주범이라는 오해가 파다하다.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후천성 면역결핍증)의 대문자를 딴 AIDS(에이즈)는 81년 6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남성 동성애자 5명에게서 처음 확인됐다. '에이즈=동성애자의 질병'이라는 등식은 여기서 비롯됐다. 그러나 에이즈를 '동성애자들에게 내린 신의 재앙'으로 볼 근거가 없다는 데 의학계가 동의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최근 헌혈을 할 때 '동성과 성 접촉이 있었는가'라는 문진을 못하게 했다. '성 접촉에 따른 에이즈는 대상이 동성이든 이성이든 관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가운 조치다.

미국의 여성 비평가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질병은 그저 질병일 뿐 저주도, 신의 심판도 아니니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라"고 했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게 우리 안의 편견이란 말이렷다.

이영기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