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강도가 겁탈하려 하자 모기에 물린 자국을 보여주며 "에이즈에 걸려 어차피 죽을 목숨, 마음대로 하라"고 해 위기를 모면한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 여성의 침착성과 기지도 대단하지만 한편으론 에이즈가 우리 시대의 역병이란 걸 새삼 확인하게 된다.
돌림병은 치료제가 나오기 전에는 사람들을 극단적인 두려움으로 몰아 과잉 반응하거나 패닉(정신적 공황) 에 이르게까지 한다. 국내에서 에이즈 감염 환자가 처음 발견된 건 1985년이다. 이후 '에이즈에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는 잘못된 인식이 번지면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실제 감염이 안 됐는데도 "체중이 갑자기 줄었다" "고열과 식은땀이 난다" "반점이 여럿 생겼다"며 지레 겁먹고 자살한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전과 같은 막연한 공포심은 많이 수그러든 것 같다. 그러나 에이즈가 '몹쓸 병' 이라는 생각은 아직도 만연하다. 특히 동성애자들이 에이즈를 만들고 퍼뜨리는 주범이라는 오해가 파다하다.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후천성 면역결핍증)의 대문자를 딴 AIDS(에이즈)는 81년 6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남성 동성애자 5명에게서 처음 확인됐다. '에이즈=동성애자의 질병'이라는 등식은 여기서 비롯됐다. 그러나 에이즈를 '동성애자들에게 내린 신의 재앙'으로 볼 근거가 없다는 데 의학계가 동의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최근 헌혈을 할 때 '동성과 성 접촉이 있었는가'라는 문진을 못하게 했다. '성 접촉에 따른 에이즈는 대상이 동성이든 이성이든 관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가운 조치다.
미국의 여성 비평가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질병은 그저 질병일 뿐 저주도, 신의 심판도 아니니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라"고 했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게 우리 안의 편견이란 말이렷다.
이영기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