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유로시대]새 천년의 도약…'유럽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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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틀 남은 유로의 출범은 '유럽통일' 에 비견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멀리는 로마제국에서 오스만 터키의 동방제국,가까이는 히틀러의 '제3제국' 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유럽통일의 시도는 수없이 많았지만 아무도 유럽의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지는 못했다.

'유럽통합의 아버지' 인 장 모네와 로베르 슈망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 (ECSC) 창설을 통해 통일유럽의 이상을 선포한 지 47년 만에 마침내 유로라는 이름으로 '통일' 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프랑스 여론조사기관인 IPSOS의 최신 조사에서 유럽인의 61%가 유로 출범에 기대감을 표명한 것은 숱한 전쟁과 대립으로 점철돼온 유럽사에서 단일통화가 갖는 상징성 때문만은 아니다.

현실적 기대 또한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유로의 도입은 유럽 단일시장의 완성을 의미한다.

환전에 따른 비용과 환율변동이라는 불확실성이 제거됨에 따라 역내 (域內) 교역이 활성화됨으로써 이미 60%에 달하는 역내 교역비중은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이는 기업간 경쟁을 촉진, 유럽기업들의 대외경쟁력이 강화되고 이에 따라 성장과 고용도 증가할 것이라는 기대로 이어진다.

상품과 서비스의 지역.국가별 가격차가 선명해지는 데 따른 가격의 하향평준화 현상 또한 소비자에게는 득이 될 것이다.

이미 유럽기업들은 저비용.고효율 구조로의 심각한 전환압력에 직면해 있다.

비용절감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지 않으면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최근 들어 열풍처럼 번지고 있는 인수.합병의 열기는 유럽기업들의 대응노력을 대변하고 있다.

유로랜드의 출범을 14세기 봉건경제로의 회귀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국경이 무의미해진다는 얘기다.

11개국 2억9천만명의 인구가 밀라노 - 제노바, 프랑크푸르트 - 슈튜트가르트, 리옹 - 마르세유 - 바르셀로나 등 몇 개의 성장축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연간 6조3천억달러의 경제권이 자생력을 갖게 된다는 분석이다.

세계경제의 흐름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자체 성장원동력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늙은 대륙' 유럽이 세계의 새로운 성장핵 (核) 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프랑스 재경장관은 3%로 일치된 유럽 11개국의 사상 유례없는 저금리와 성장중심의 정책공조는 내수소비와 기업투자 증가로 이어져 "향후 몇년간 유럽은 세계최고의 성장지대가 될 것" 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그러나 곳곳에 불안요인도 도사리고 있다.

우선 지적되는 점은 기업들의 구조전환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다.

유럽의 노동시장 유연성은 미국의 절반 수준이고 노동시장의 이동성은 3분의1에 불과하다.

사회복지 부담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관대한 사회복지 혜택에 길들여져온 유럽인들이 쉽게 고통을 감내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독일 사민당 정권 출범으로 유럽은 전통적으로 분배적 정의를 강조하는 좌파로 색깔이 통일됐다.

이미 독일.프랑스 정치권에서는 기업계가 당면한 현실을 도외시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통화가치 안정을 내세우는 유럽중앙은행 (ECB) 과 정치권이 이미 갈등조짐을 보이고 있고 정책공조를 둘러싸고 역내 강국인 독일.프랑스간 갈등 또한 표면화하고 있다.

유로 출범 이후 세계경제가 본격적 침체국면에 진입, 유로랜드 가운데 어느 한 나라라도 ECB가 정한 통화.신용정책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못해 손을 들고 마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다른 나라들이 재정정책을 통해 곤경에 빠진 나라를 지원할 정치적 의지가 존재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유로가 이미 유로당 1.2달러선으로 강세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도 유로의 장래에는 불안요인이다.

수출경쟁력이 그만큼 약화될 수밖에 없는 탓이다.

국제통화기금 (IMF) 은 유로출범 효과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유럽국들이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에 성공할 경우 오는 2010년까지 현재 10%인 실업률을 2%포인트 낮출 수 있겠지만 실패할 경우 실업률이 2%포인트 증가하는 건 물론이고 세계경제에 큰 부담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새 천년을 맞는 문턱에서 11개국이 통화주권을 포기하고 화폐를 하나로 통일하는 사상 초유의 실험인 유로의 출범은 일단 '불확실성으로의 도약' 이라고 부를 만하다.

파리 = 배명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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