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 아침]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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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 정희성 (鄭喜成.53)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중

내가 정희성을 본 것은 그가 은사의 조교로 일할 때였던가.

그는 대학에 남을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내 모국어와 함께 살아왔다.

가만히 뚜껑을 닫아둔 항아리처럼 신중한데 그 뚜껑을 열면 거기 알뜰히 담겨있던 지사 (志士) 의 모습이 나온다.

이 시 속의 농부도 그런 권속이다.

70년대 중반에 이미 썩은 샛강물의 구슬픈 달빛이 있었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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