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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다, 어제를 만나다 ⑥여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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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항에서 바라본 돌산대교 모습. 돌산대교 너머 광양만 앞바다에서 이 충무공이 전사했다.

다음 지명의 공통점은? ①서울 ②아산 ③통영 ④진도 ⑤여수

정답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이다. 긴 칼 옆에 찬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 서울은 이 충무공이 태어난 곳이고, 충남 아산은 공(公)의 유해와 영정을 모신 현충사의 고을이다. 경남 통영은 세계 3대 해전으로 꼽히는 한산대첩으로, 전남 진도는 가장 극적인 전투로 전해지는 명량해전으로 공을 기억한다.

그럼 전남 여수는? 거북선의 고향이다. 1591년 2월 13일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공은 1593년 7월 14일 수영을 한산도로 옮기기 전까지 전라좌수영이 설치된 여수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 여수에 내려오자마자 공은 거북선을 제작했고, 이듬해 임진왜란을 맞았다. 왜(倭)가 부산에 상륙한 지 20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던 그 아비규환의 시간, 공은 남쪽 바다에서 묵묵히 왜적을 무찔렀다. 조선 육군이 도륙을 당했던 임진왜란 첫해, 공은 옥포·적진포·사천·당포·율포·부산포 등 11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공은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이로써 조선은 호남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고, 왜의 전략은 시작부터 휘청거렸다. 그 해전 모두가 여수에서 비롯되었다. 전라좌수영을 출발한 공의 함대는, 오늘의 남해도를 거치고 사천을 지나 통영과 거제도를 헤집은 다음 진해 너머 부산까지 나아가 왜적을 물리친 뒤 여수 진영으로 복귀했다. 여수는, 임진왜란 첫해 조선의 유일한 해방구였다.

충무공과 연을 맺은 도시마다 이른바 ‘이순신 마케팅’으로 분주한 요즘, 여수는 2012년 열릴 엑스포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 무인 이순신
첫걸음은 진남관이어야 마땅하다. 진남관은 여수 앞바다가 내다보는 언덕에 들어선 좌우 75m의 목조건축물이다. 지방 목조건물 중 가장 크다. 애초엔 전라좌수영 객사였고, 난이 끝나고선 임금께 제를 올렸으며, 일제 때와 광복 직후엔 학교로 쓰였다. 진남관은 국보 304호다. 규모 덕분이기도 하지만 민흘림 원형기둥 68개와 나무 마루를 정교하게 끼워 맞춘 기술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진남관 앞에 석인상이 하나 서 있다. 석인상은 일종의 허수아비였다. 우리 바다를 자꾸 기웃거리는 왜를 겁주려고 공이 바닷가에 세워두었단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무인이 아니라 문인의 모습이다.

거북선 비석. 이 충무공의 어머니가 살았던 곳에 세워져 있다.

충민사로 걸음을 옮긴다. 충민사는 공을 기려 1601년 세운 사당이다. 하여 충민사는 절이 아니다. 사원이다. 선조가 직접 이름을 내렸으니 사액 서원이다. 충무공을 기린 최초의 사액 서원이다. 통영의 충렬사보다 62년, 아산의 현충사보다 103년 이르다. 충민사 앞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하마비는 말에서 내리라는 표지석으로, 궁궐이나 왕릉 앞에 주로 서 있다. 그 하마비가 여기도 있다. 충민사는 궁궐·왕릉과 동격이었던 셈이다. 하나 충민사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됐다. 이후 지역 유림의 진정으로 다시 세웠고 1917년 일제가 부순 걸 광복 이후 복원했다.

선소(船所)는 배를 ‘뭇던’ 곳이다. ‘뭇다’는 ‘배를 만들다’는 뜻의 우리말로, 우리 바닷가에 ‘배무시’란 지명이 자주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여수시청 근처의 선소도 원래 배무시라 불렸다. 여기가 거북선을 제작한 곳이다. 배를 정박하기 위해 둑을 둥그렇게 쌓은 굴강, 거북선을 매어두던 계선주 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 선소 앞바다 장생포는 고려가요 ‘동동’의 배경이 된 곳으로 전해지며, 지금은 숭어 떼가 종종 출몰해 여수시민의 낚시터로 인기가 높다.

진남관 입구에서. 조선시대 땐 바로 이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左). 오른쪽은 선소 굴강의 모습. 막 건조된 거북선이 여기에 정박해 있었다.

# 인간 이순신
여수엔 이 충무공과 연이 닿은 사당과 사찰이 수두룩하다. 여수가 자랑하는 800여 년 역사의 흥국사도 그러하다. 난이 일어나자 승려들은 군대를 일으켰고 여기서 훈련을 받았다. 승병들은 공의 성품에 반해 공의 휘하에 스스로 편입됐고, 난이 끝난 뒤에는 사당을 지어 공을 기렸다. 그 사당이 석천사다. 충민사 바로 옆에 있다. 여수의 승병은 충무공의 지휘를 직접 받았다. 공의 그릇이 짐작되는 대목이다.

부하 군사들이 순절한 공을 잊지 못해 세운 비석도 있다. 비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는 뜻의 타루비(墮淚碑)다. 국내 비석 중 가장 큰 통제이공수군대첩비 옆에 서 있다. 두 비석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고, 두 비석 모두 일제 때 실종됐었다. 광복 이후 서울의 국립박물관 정원에 묻혀 있던 걸 찾아내 옮겨왔다.

웅천동에 가면 오충사란 작은 사당이 있다. 충무공과 공을 모시고 왜를 물리친 창원 정씨 4명 등 5명을 모신 사당이다. 그 사당이 들어선 동네가 송현마을이다. 어머니 변씨 등 공의 가족이 난이 일어난 이듬해부터 5년간 예서 살았다. 난이 일어나자 공은 충남 아산에 머물던 가족을 자신이 부임한 고을로 이주시켰다. 특히 팔순의 노모를 조석으로 찾아 뵙고 문안을 드렸다. 옛집은 사라졌지만 그 터에 비석이 남아 있다. 변씨 부인이 직접 사용했다는 맷돌과 돌절구 등도 출토됐다. 『난중일기』를 보면 변씨 부인에 관한 기록이 모두 80일 보인다. 그중 한 토막을 옮긴다. “1594년 1월 12일 맑음.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하고 여러 번 타이르며 조금도 이별을 탄식하지 않으셨다.” 바로 여기 송현마을에서의 일화다.

답사 정보=진남관 아래 임란유물전시관이 있고, 충민사 옆에는 충무공 유물박물관이 있다. 여기서 예습을 하고 답사를 시작하자. 여수지역사회연구소(http://yosuicc.com)가 여수의 역사를 찾아다니는 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061-651-1530. 문화재청이 11월 11~15일 여수시 일대에서 ‘문화유산과 관광이 만나는 스토리텔링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주제가 ‘이순신과 거북선 이야기’다. 디지털 스토리텔링 공모전, 문화유산 해설 콘테스트 등 여러 행사가 열린다.

여수 글ㆍ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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