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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이 남긴 유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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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아키노 전 대통령은 필리핀에서 독재정치가 14년간 계속될 당시 민중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그도 남편인 니노이 아키노가 살아있을 때는 조신하고 친절한 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남편이 1983년 암살당하자 독재정권에 맞서기 시작했다. 필리핀에서 민주주의를 일으키는 지도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아키노는 독재정권이 무슨 짓을 했는지 민중에게 꾸밈없이 설명했다. 남편을 잃은 그의 아픔은 필리핀 민중이 받는 고통과 잃어버린 희망을 일깨워 줬다. 신의 무한한 지혜 속에서 마침내 시민들은 폭력을 쓰지 않고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렸다.

아키노가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군대와 경찰은 그를 지지했다. 그는 강건한 원칙으로 군경 조직을 강화했다. 재임 당시 위기가 거듭되더라도 아키노는 민중을 섬기는 지도자로서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군 통치자로서 아키노는 국방부와 군대를 신뢰했다. 아키노의 군대는 마르코스를 지지하는 반군이 벌인 아홉 번의 쿠데타 시도를 모두 막아냈다.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공멸하기를 바라는 쿠데타였다. 하지만 아키노는 위축되지 않았다.

기도와 헌신은 아키노의 중요한 일과였다. 의사 결정을 내리고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신념은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게끔 도왔다. 그의 정신적 힘은 신의 무한한 은총과 자비에서 비롯됐다. 혁명 후 아키노는 정치적 입장이 다른 경쟁자도 등용했다. 또한 국제 사회에서 필리핀이 위엄 있고 존경을 받게끔 만들었다.

아키노가 타계함으로써 필리핀은 부모를 잃은 국가가 됐다. 아키노 뒤에 서 있는 우리는 그가 남긴 자유의 유산을 지켜 사회 정의를 실천하고 국가 통합을 이끌어내야 한다. 아키노는 말년에 암과 투쟁하면서도 지도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리핀인과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아키노에게 조의를 표하는 방법은 미래에 대한 책임의식을 발휘하는 것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켰던 86년의 평화로운 혁명은 아키노와 그의 남편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아키노가 선사한 자유는 세대를 거치면서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빈곤과 불평등·불의로부터 자유를 지키는 과정에서 야기된 갈등이다. 이 갈등을 이겨내기 위해 우리는 운명이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하지 말고 솔선해서 희생하고, 의무를 지키고, 인류 복지를 위해 일해야만 한다.

크고 작은 국가와 사회 모두가 자유를 지키는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희생과 봉사로 가득한 아키노의 인생은 우리가 자유를 지키면서 야기되는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아키노가 남기고 간 유산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의무다.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
정리=김민상 기자 ⓒ Project Syndic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