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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주의가 한국 보수의 이상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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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외환위기 사태 이후 시장주의는 한국 보수주의의 이상이 돼 버렸다. 한국의 경제체제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못 미쳤기 때문에 외환위기를 맞게 됐다는 대내외의 분석과 비판이 쏟아지면서 한국의 보수는 시장주의로 급선회했다. 국제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던 대기업들은 이런 경향을 부채질했다. 또 외환위기 사태를 전후로 분배주의를 주장하는 좌파가 새로운 주류로 떠오르자 이에 대한 대안논리로 한국의 보수는 시장주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주의는 과연 ‘시장’을 보수하고자 하는 것인가.

***시장주의 대신 국가주의 선택을

한국 경제발전 모델은 ‘자본주의 개발국가(Capitalist Developmental State)’였다. 미국의 자유시장주의, 유럽의 사민주의, 소련의 계획경제에 대한 대안으로 국가가 자본주의 원칙을 채용해 중산층과 시장을 형성시키고 수출을 통해 ‘국부’를 창출하는 모델이었다. 기업은 국가가 설정한 생산과 수출목표를 달성한다는 전제하에 노동과 외국기업, 외국 자본에서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는 수많은 규제와 개입을 통해 자유시장경제의 역기능인 부의 편중을 막고자 했다. 절약과 저축을 신성시하는 한편 ‘외제’, 특히 고급산 외제의 소유를 금기시하고 아파트 건설 단가를 제한하는 등 국가의 지원과 보호하에 축적된 부를 과도하게 향유하거나 과시하는 행동을 규제했다.

그 결과 한국경제는 세계 10위권에 진입했다. 순수 자본주의의 효율성이나 사회민주주의의 형평성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세계가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사태는 자본주의 개발국가가 성장과 분배 중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인식을 확산시켰고 그 결과 시장주의자들과 계급주의자들에 의해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보수는 시장을 택했다. 그러나 과거 한국의 모델이 ‘자본주의 개발국가’였다면 한국의 보수가 택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보다 ‘개발국가’, 다시 말해 국가주의다.

국가주의란 개인의 재산권도, 계급간의 분배정의도 국익 앞에서는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주의를 추구하다 보면 계급의 이해나 개인의 이해가 침해당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과거에는 국가가 개인의 권리와 계급의 이해를 묵살했다. 민주화는 이런 국가 공권력의 남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절차의 설립을 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곧 국가가 약화되거나 해체될 필요는 없다.

이러한 사상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많은 사람은 말한다. 그러나 세계화와 정보화를 통해 국경이 급속히 무너질수록 국가의 존재와 역할은 더 중요해진다. 세계의 자본과 기술·인력이 대거 몰려오는 상황에서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장치는 결코 시장도, 노조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과 노동이 충돌할 때 중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국가밖에 없다.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386세대가 중국을 보고 와서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이야말로 순수 자본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개발국가 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국가의 강력한 리더십, 산업정책 없이는 중국의 발전은 불가능했다.
물론 과거의 한국이나 오늘의 중국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자본주의 개발국가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독재를 통한 장기 집권이 가져다 주는 정치적 연속성이다. 따라서 세계화와 민주화가 이뤄진 상황에서 권위주의와 독재를 바탕으로 한 개발국가의 재건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 개발국가를 더 해야 한다. 최소한 개인 소득 2만~3만달러 시대까지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본·노동 충돌 때 국가가 중재

답은 자명하다. 이제는 정부와 노동계·재계의 자발적인 합의만이 개발국가를 지속시킬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심지어 보수진영 내에서도 현재 이런 국가에 대한 합의가 없다는 데 있다. 오히려 시장을 이용해 개발국가 체제를 부정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한국의 많은 보수주의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는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시장의 효율성도, 사유재산권의 향유도 국가의 발전과 국부의 축적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단순한 진리를.

함재봉 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